brunch

매거진 On the roa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꽃봉 Dec 13. 2023

미련의 무게

내 하루가 담긴 움직이는 집

 속수무책으로 펼쳐진 캐리어와 배낭은 떠나기 5일 전인데도 텅텅 비어있다. 호기롭게 산티아고를 간다고 했으나 대책 없는 마음이 벌써부터 보인다. 긴 여정에 필요한 게 뭔지 도무지 감도 안 오고, 당시 예비 퇴사자의 신분으로 인수인계라는 듣기 좋은 핑계가 있으니 자꾸만 미뤄지는 짐 싸기가 됐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가는 통로는 이미 막혔다. 이 상태론 안 되겠다 싶어 떠나기 2일 전, 그토록 바라지 않던 커뮤니티에 결국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야 말았다. 불안을 잠재워줄 질문을 찾는 것조차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추천하는 필수품과 생각나는 족족 아무거나 가방에 넣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여행준비가 이리도 노답인 적은 처음이었다. 뭘 넣긴 했는데, 누군가 가방에 뭐가 들었냐 묻는다면 열어 보여주는 게 빠르겠다 생각했다. 꼭 있어야 한다는 침낭과 갖가지 옷들, 세면도구 등 생필품은 다 챙긴 것 같고, 어디서든 요가를 위한 매트. 매일을 기록할 아이패드와 키보드. 순간을 담아 줄 미니캠과 감성이 깃든 필름 카메라. 나를 상징하는 책갈피도 챙겼고, 또.. 외에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진 가방은 무려 10kg를 넘기고야 만다. 마음이 닿는다면 무게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10kg를 매고 걷던 첫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허벅지 근육과 유목민 일상에 스며들기 바빠 등에 매달린 무게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 별거 아니구먼. 이틑날의 여정 또한 강한 비바람 구간과 금세 찾아온 멋들어진 풍경, 한시가 변덕스런 날씨를 맘껏 감탄하랴 몸이 어찌 됐든 대수롭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최면에 걸려 있었다.


 걷는 길 6일 차, 레온틴에게 각자의 속도를 선언하고 온전히 혼자일 때였다. 산솔(sansol)->로그로뇨(Logroño) 약 21km.  매일을 5시간 이상 걸었더니 결국 탈이 나고야 말았다. 이 상태로 걷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았던가, 바보 같은 지게꾼이 한시라도 빨리 가방을 내려놓을 알베르게를 찾고 있다. 대도시라 많을 줄 알았던 알베르게는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았고, 겨우 찾은 숙소에선 1인실 뿐이라 했다. 행여나 놓칠까 다급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무려 30유로.(공립 알베르게는 대부분 8-10유로, 일반 도미토리가 비싸야 15유로를 넘지 않는다.) 하필 2층에 위치한 1인실은 또 한숨을 불렀다. 스페인의 2층이라 함은 한국의 3층이다. 이 짐짝(배낭이라 부르기도 싫었다)과 당장 버리고 싶은 신발을 기어이 데리고 1인실 도착. 조여 오는 어깨의 짐을 더 이상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씻으러 가야 하는 순서는 머릿속에서 진즉 사라졌고. 가방을 비우자!


로그로뇨 1인실 숙소

 움직이는 작은 집. 이 배낭에 내 모든 하루가 담겨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여겼던 당연한 것들이 이 유목민의 생활에선 '꼭 필요한 것'과 '굳이' 없어도 되는 물건들로 선명히 나뉜다. '신중하자 연주야. 이건 고작 짐이 아니야. 너의 삶이야.' 마음이 여기에 머무르니 잠시나마 이 배낭은 내 인생이 된다.

 긴바지 2장, 티 3장, 영양제, 베개, 우비 등. 짐 싸던 날 들어가 빛을 못 본 녀석들이 꽤 있다. 내가 이런 걸 쌌다고? '옷은 딱 2벌만 있으면 되지, 양말은 하나면 돼', '영양제는 걷고 나서 먹어도 괜찮아', '비는 맞으라고 있는 거야.' 버려야 할 이유를 붙여가며 줄곧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이 조그마한 것에 내 미련함이 참 많기도 했다. 잘가라 내 미련들. 아 홀가분해!



 걷다 들리는 소식으로 어떤 순례자의 가방은 3.5kg라 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거짓말 아니야? 오직 가방 무게만 해도 그렇게 나올 수 없을 텐데. 옷은 갈아입긴 하는 건지. 한여름에도 유럽의 저녁은 서늘한데 침낭은 있는 건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길 생활과 안위가 궁금했다. 후일담에 그는 주변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거나 다소 불편한 길을 걸었다고 들었다. 대도시에 오래 머물러 이것저것 사쟁이를 했다는 소문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다만 나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결말에 왜인지 모를 안도의 고마움이 마구 솟아났다.





 언젠가 요가를 하며 '비움'에 빠진 적이 있다. 사심을 채우려 하나 둘 들이던 게 산만큼 쌓여 내가 필요로 하는 건 거의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다 만난 요가 덕분에 생활의 호흡을 할 줄 알게 됐고, 걷잡을 수 없이 불어 가는 짐들이 지겨워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버렸었다. 비움이 나를 지배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 한 번은 멀쩡히 가지고 있던 매트리스가 거슬렸다. 주말 놀러 오는 남자친구(현 남편)를 일일 노동자로 채택해 곧장 갖다 버렸고, 올 때마다 애먹던 애인이 매트리스를 다시 사준다고 했으나 몇 번의 거절. 끝에 못 이기는 척 다시 들였다는 슬프고도 웃긴 이야기가 있다. 사실은 내가 더 불편했었는데 단순하게 살고싶어 '비움에 욕심'을 내었지 싶다. 덜 후회하고자 하는 ‘미련함’과 함께.


 어찌 됐든, 나는 비움과 채움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경험을 해봐야 미련이 없듯, 비움도 채움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채워봐야 비울 수 있는 용기도 생기니까. 10년 만의 휴식기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이번 여행의 짐 싸기는 실패였으나 여기서 또 하나 나를 발견했다. 욕심이 많고 미련은 더 많은 사람이라고. 순례자들 사이에서 배낭의 무게는 '욕심의 무게'로 통일된다. 욕심이라 함은 사심을 채우는 마음일테지, 하지만 내게 이 '욕심'은 비움과 채움을 조절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아마도 내 가방 안은 없으면 후회할 아쉬움에 치우쳐 무게를 불려 나간 것 같다. 참으로 미련스럽게 말이야.


 다이어트에 성공해 7kg가 됐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10kg였다. 아주 바보같이 음식의 미련은 절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목민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