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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an 24. 2024

몰리나, 아름다운 나의 세헤라자데.

-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

무대는 천정 가까이 위치한 창으로 소심한 햇빛이 들어오는 감방 안이다. 일인용 침대가 무대 끝에 각각 위치해 있고 거대한 문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책상과 의자, 변변치 못한 가재도구들이 놓인 허름한 장식장이 있다.


1960년대 아르헨티나의 어두침침한 이 감방에 갇힌 사람은 몰리나와 발렌틴이다. 감방 밖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연이어 발생했다. 빈부격차는 설명할 수 없이 벌어졌으며,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진행 중이고 한때 떠오르는 신흥 대국으로 평가받던 경제는 엉망진창으로 추락한 상황이다.




발렌틴이 속한 조직과 정부의 대립을 1970, 80년대 우리나라 학생 운동과 정부의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고 말하면 편하겠지만, 그걸 떠올릴 수 있는 관객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20대 혹은 30대의 관객들에게 1970년 혹은 80년은 역사책 속 한 페이지에 불과할 테니까.


20대의 발렌틴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대항해 저항하는 세력의 일원이다. 이미 고문을 당한 탓에 완전하지 못한 몸으로 감방 안을 서성거린다. 두들겨 맞아 몸이 불편한 사람이 성격이 고분고분할 수도 없다. 그에 비해 30대 후반의 몰리나는 정치와 상관없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다. 미성년자와 음란한 동성행위를 했다는 죄.


일상의 거리에서는 결코 마주칠 일이 없을 두 사람이 감방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흑표범 여인이 거리를 걷고 좀비가 춤을 춘다. 자신과 다른 여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천일 동안 왕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처럼 몰리나는 감방 속에서의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발렌틴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2시간 동안 내 앞에서 펼쳐졌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이라는데 내게는 첫 공연이었다. 감출 것도 없이 나는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작품 속 몰리나라는 인물을 몹시 사랑한다. 정말 아름다운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마누엘 푸익(Juan Manuel Puig Delledonne)이 쓴 [거미 여인의 키스]는 소설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이후 이 작품을 각색해 만든 영화로도 최고인 작품이다.




소설은 대화체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 외 소장과의 대화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지만 책의 90퍼센트 이상은 두 사람의 대화다. 당연히 책을 읽으며 연극 혹은 영화의 장면을 상상하기 적합하다. 발렌텐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 몰리나는 이런 남자일 것이다라는 상상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내 상상 속의 두 사람과 무대 위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일치하는가, 혹은 다른 모습일지라도 얼마나 납득되는가일 것인데……


극장을 꽉 매운 관객들이 원작을 읽고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접는다면, 과연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감방에 갇힌 두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연극의 배경을 알려줄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발렌틴은 사회주의자다. 사회 정의와 평등을 말한다. 하지만 고문으로 몸은 쇠약해졌고 심신도 약해졌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몰리나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지만 뿌리칠 수도 없는 상태다. 그의 말은 난폭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또는 말은 따뜻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복잡한 상태의 발렌틴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몰리나는 게이다. 1960년대 가부장적인 질서를 완전하게 체화한 게이다. 그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고, 그것도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돌보고 싶어 하고 희생하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 이 또한 표현하기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대 위 배우들이 평면적으로 인물들을 표현했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관객들에게 그 시대를 알려주고, 그들이 처한 입장을 알려줘서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들게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무대가 언제, 어느 곳인지도 모르고 극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을 관객이라면 아마 많은 실망을 안고 귀가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쉬운 마음이지만 몰리나 역의 전박찬 배우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손끝, 발끝까지 몰리나가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발렌틴 역의 차선우 배우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거칠기만 해서는 발렌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된 무대이니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발렌틴이 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과거는 점점 늘어난다. 1960, 70년대도 이미 과거가 되었다. 1980년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서울의 봄]이 낯선 이야기라는 관객들이 많은 판에 1960년대 아르헨티나라니.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여차하여 발을 잘못 딛게 되면 같은 비극 속으로 빨려 들게 되는 법이다.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연극을 올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배경을 알려주는 시도를 한 후 무대를 보여준다면 극 중 배역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날이 많이 춥다. 이 연극은 3월 31일까지 예그린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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