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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pr 04. 2024

3. 원하는 술 다 줄 수 있어

- 순성 왕매실영농조합

서울에서 남쪽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서해안 쪽으로 방향을 튼다. 대륙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용맹스러운 호랑이의 감춰진 오른쪽 뒷발에 해당하는 곳이 태안반도다. 해안을 따라 난 도로 옆으로 배들이 떠 있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둑방 위를 빠르게 지나간다. 멀리 삽교호를 조망하는 대관람차가 보이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왔다고 안심해도 좋다. 차는 바다를 뒤로 하고 내륙의 굽은 길로 들어선다. 대로와 농로를 따라 핀 매화꽃이 보인다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은 시간문제다.


잘 안보이는 오른쪽 뒷발이 태안반도


‘순성 왕매실영농조합’은 2009년 설립된 영농조합법인이다. 2001년 남원천변을 따라 3만 그루, 농가에 보급한 7만 그루를 합해 10만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은 것이 시작이다. 봄을 알리는 매화꽃이 바빠진 농부들의 한숨 사이로 날아가고 6월이 되면 천지는 매실로 가득 찬다. 매실 수확 체험 행사를 열거나 수확한 매실로 청을 만들어 파는 일이 조합이 할 수 있는 초반의 모습이었다.


양조장 뒤 산책로에 매화가 한창이었다.

2009년경 시작된 막걸리 붐에 편성해 조합 한쪽에 양조장을 만들었다. 막걸리란 농부들에게는 익숙한 음식이다. 모내기로 대표되는 바쁜 농사일을 막걸리 없이 해내는 농부는 많지 않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는 고된 일 사이사이 한숨과 함께 막걸리를 마셔야 다음 일을 붙들 수 있다.


익숙하고 오래된 것들의 명칭이 그러하듯 막걸리라는 이름도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다. ‘마구’, ‘함부로’ 혹은 ‘조잡하게’에서 따온 ‘막’과 ‘거르다’는 뜻의 ‘걸리’가 합해져 ‘막걸리’라는 말이 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말하자면 막걸리란 ‘거칠게 막 거른 술’이란 의미다. 빛깔이 희다는 의미에서 ‘백주’, ‘백료’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맑지 않은 액체인 탓에 ‘탁주’, ‘혼돈주’ 같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추가 산을 넘으면 ‘정구지’가 됐다 ‘졸’이 됐다 ‘솔’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막걸리는 친숙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부르는 명칭들을 여러 겹 두르고 있는 셈이다.


막걸리가 꼭 농부들만의 음식은 아니었다. 가난한 시인들에게도 막걸리는 축복이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시구로 유명한 ‘귀천’이라는 시를 쓴 천상병 시인은 아예 ‘막걸리’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남들이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시인이 한참 막걸리를 드실 적에는 옥수수가 주원료로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대충 1970년대 이야기로 짐작된다. 모든 것을 떠나 막걸리에 대한 사랑이 담뿍 느껴진다.

주력 탁주 '매화꽃비'


이렇듯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거칠게 막 거른 술’은 공식적으로 2010년부터 막걸리와 탁주 두 가지 이름으로 통일됐다(농림축산식품부의 <전통식품규격집> 참고). 쌀과 누룩 그리고 물만 있다면 당신도 막걸리를 만들 수 있다. 아, 재료를 담을 그릇(술독이나 병 같은 것이 좋겠다)은 필수다.


먼저 물기 없이 된 밥을 지어 누룩을 넣고 잘 버무린 후 물을 붓고 그릇에 넣어 둔다. 이것으로 당신이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누룩이 일을 할 차례다. 누룩 속 미생물들이 다당류인 녹말을 끊어 내 단당류 상태로 만든다. 누룩 속 효모가 이제야 기지개를 켠다. 잘라진 단당류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소화시킨 후 에탄올과 이산화탄소를 배설한다. 이 배설물이 술이다. 과음은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 어쩐지 술에 대해 정이 떨어지라는 의미로 ‘배설’이라고 적어봤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술잔을 놓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술꾼이다.


아무튼 탄산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대신 희고 탁한 액체가 남는다. 이것이 막걸리다. 혹시 잘 발효되고 남은 밥알들이 동동 떠올랐다면 동동주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연발효 과정을 거친 술의 알코올 도수는 14-16% 정도다. ‘원주’라고 부른다. 상업용 막걸리는 여기에 각종 첨가물과 물을 섞어 알코올 도수를 6-8% 정도로 맞춘다. 어떤 첨가물인지가 영업 비밀에 해당한다.


막걸리 양조장


잘 발효된 원주를 가만히 놔두면 위에 맑은 액체가 뜨고 탁한 것들은 가라앉는다. 그 맑은 액체만 건져 올린 것이 ‘청주’다. 투명하고 양이 작다. 당연히 비싸다. 이 청주는 주로 귀족이나 부자들이 마시거나 제사상에 올리는 제주로 사용했다. 


청주를 소줏고리에 걸고 증류하면 ‘소주’가 된다. ‘순성 왕매실조합’에서는 이중 막걸리와 소주를 생산한다. 탁주인 [왕매실막걸리], [매화꽃비], 40도 증류주인 [상록수], [아미주]가 대표 상품이다. 특이하게 탁주 제조장 옆에 맥주 양조장이 공존한다. 백선바이젠, 아미페일에일, 솔뫼 IPA, 검은들 스타우트 총 4종류의 맥주가 생산된다. 조합에서 생산하는 매실이 각 제품에 사용된다. 이렇게 다른 종류의 술을 비슷한 공간에서 만들어도 문제가 없는 걸까?


막걸리 동에서는 효모가 중요합니다. 맥주동이나 이런 곳에서 다른 효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요.

막걸리 동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자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원주를 증류하면 아침부터 시작해도 밤 8시 정도가 돼야 끝납니다. 시간대 별로 도수를 체크하고 42도 정도로 맞추게 되죠. 이렇게 모아진 증류주는 5년 정도 숙성기간을 거칩니다. 그 숙성된 술을 가지고 25도와 40도의 아미주를 생산합니다.

위스키와 와인에만 숙성기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막걸리와 맥주 양조장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맥주 4총사. 내 픽은 IPA!
맥주는 으깬 맥아(보리)를 당화조에 넣고 60도 정도에서 당화를 시킵니다. 그런데 쌀은 당화 온도가 70-80도 정도입니다. 필요한 온도가 다르죠. 그래서 쌀과 보리를 섞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화를 두 번 해야 합니다. 번거롭죠. 하지만 방법을 찾았고요 곧 상품으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맥주에 사용하는 재료는 모두 인근의 농촌에서 나온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맥주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맥아 원료는 일부 국산을 사용하고 있지만 수급이 불안정합니다. 그것도 군산에서 가져와요. 멀지만 할 수 없죠. 하지만 에일에 사용하는 스페셜 몰트들은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아요. 수입 재료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맥주에는 매실 발효원액이 들어가요. 향과 맛을 헤치지 않는 범위를 잘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마셔보면 맛이 진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시음장에서 한번 드셔 보세요.


[매화꽃비]는 달달한 맛이 드러나는 탁주이고 [아미주]는 맑고 개운하다. 맥주에서 매실원액의 맛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쌉쌀한 IPA는 입맛을 확 잡아당긴다.


농촌의 고령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젊은이들이 일할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지역의 특산물을 가지고 술을 빚는데 게다가 맛까지 훌륭하다면? 순성 왕매실영농조합은 이런 쉽지 않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는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곳에 매실을 이용한 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엔 진달래 꽃이다. 순성면을 출발한 차는 몇 분 후 두견주 양조장이 자리한 면천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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