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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pr 10. 2024

한국의 남자들이란

- 연극 [케이멘즈 랩소디]

이 작품을 쓴 작가이자 연출자는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대표인 김재엽이다. 그는 한국 남성, 바꿔 말하면 케이맨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케이맨이 쓴 케이맨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혐오, 일베, 페미니즘 같은 담론이 넘쳐나는 요즘에 쉽게 나서서 말하기 힘든 주제를 대범하게 들고 나왔다. 2022년 [한남의 광시곡]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을 이번에 [케이멘스 랩소디]라는 이름으로 바꿔 들고 나왔다. 아마도 ‘한남’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뉘앙스에 대해 누군가 딴지를 건 것일까?


약자가 목숨을 걸고 강자를 희화화해 말하는 것은 풍자이지만, 강자가 약자에 대해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것은 혐오다


무대 위에는 책상과 의자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왼쪽으로 성벽을 형상화한 높은 구조물이 서 있다. 무대 뒤로 영상 자료를 보여주는 화면이 설치되어 있다. 불이 켜지면 4명의 남성 배우와 3명의 여성 배우가 등장한다. 배우면 배우지 남성, 여성은 무엇에 쓰려 붙인 것인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짐작된다. 맞다. 배우면 배우고, 군인이면 군인이고, 학생이면 학생이다. 여배우, 여군, 여학생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선말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간 한국의 남성들이 보여준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입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말하고, 여성들은 그 말의 허구성과 비논리성을 꼬집는다. 그러니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야기는 1920년대 조선에서 시작한다.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시대에 눌려 불행하게 살다 간 나혜석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기생 현계숙 등 실존인물에서 영감을 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그의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 이렇게 말한다.


혐오의 경우,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행위자 자신의 두려움과 연관된 속성은 힘이 약한 집단을 대상화해서 투영되며, 이들 집단은 지배적인 집단이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가 자신과 다른 계급, 인종, 나라에 대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리하여 이 연극의 소재는 여성 혐오를 넘어 계급에 관한 이야기까지 뻗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을 달려 유신 정권 말기 신민당 당사 점거 농성 중 의문사한 YH무역의 노동자 김경숙 열사에서 모티프를 딴 인물이 등장하고,  2016년 넥센이 출시한 게임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을 지나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른다. 120분의 시간을 그야말로 사건들로 꽉꽉 눌러 채운 셈이다.




이 사건들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고찰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모름지기 어렵고 근엄한 이야기는 가볍게 풀어가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일곱 명의 배우들은 노래하고, 웃고, 책상 위를 뛰어다니고, 싸움을 벌이고, 관객에게 넋두리를 늘어놓는 다양한 기법들을 구사한다. 덕분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한 명의 배우가 도대체 배역을 몇 개 소화한 것인지는 셀 수도 없다.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나 싶었는데 재빨리 의상을 교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얼굴이 되어 잔잔한 표정으로 전하는 대사를 들으며 무대 뒤는 전쟁터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여성의 서사를 나열하는 것에 그쳤을까? 연극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앞서 말했던 마사 누스바움의 책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긴장은 오늘날 특히 소년들의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아무도 소년들에게 자신들의 내적 세계를 탐구하고 표현하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소년들은 감정 표현에서는 까막눈이다…… 킨들론과 톰슨이 특히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소년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성격의 모든 측면(감정 특히 욕구, 슬픔, 동정심)을 폄하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소년들의 삶을 특징짓는 수치심의 다층적 경험은 여성을 향한,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향한, 종종 자신이 속한 문화의 지배적인 구성원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진다.


마사 누스바움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여성 혐오나 차별 같은 문제에서 승리하는 젠더는 없는 셈이다. 남성, 여성 모두 상처받는다. 이러한 생각들이 연극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보통 한 편의 연극을 보면서 배우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드문데, 이 연극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박희정, 김세환, 백운철, 서정식, 이소영, 이태하, 정유미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열과 혼을 불사른다. 몸을 던지고 목청도 내놓은 느낌이다. 덕분에 관객인 나는 신나는 관극을 경험했다.


하지만 마음까지 즐겁고 편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여성의 한 사람으로 2시간 동안 계속되는 여성 혐오의 서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이지 큰 감정적 스트레스였다. 마치 미국 노예제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야 하는 그 자손들의 심정이랄까. 작가가 아무리 작품을 훌륭하게 쓰고 배우들이 영혼을 불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덕분에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기력과 절망감 비슷한 감정에 잠겨버렸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조금 다르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면 여성과 더불어 남성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의 세환과 여자친구처럼 남성과 여성은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며, 감정을 교류해야 한다. 그러니 이 연극을 한번 보는 것은 어떨지? 그리하여 다른 젠더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더 해보는 것은 어떨지. 여러 가지 이유로 추천하고 싶은 이 연극은 4월 2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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