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밝아진 무대 위에는 다리에 피를 흘리는 여자가 보인다. 남자가 달려와 그녀의 보호자가 된다. 남자의 이름은 댄. 소설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부고 담당 기자다. 죽은 사람에 대해 그럴듯한 포장 문구를 쓰는 것이 그의 일이다. 완벽한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떤 지점에 존재하는 글을 댄은 매일 쓰고 있다. 완벽한 거짓말(소설)을 쓰고 싶지만 대략적인 거짓말(부고)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나 할까.
피를 흘리는 여자의 이름은 앨리스다. 이렇게 댄과 앨리스는 만났다. 우연히 만나 어떤 감정을 느끼는 사이 택시에 치인 앨리스를 댄이 응급실로 데려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쓰러져 있던 앨리스가 정신을 차리고 댄에게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안녕, 낯선 사람?”
앨리스는 댄의 이야기를 듣지만 또한 ‘본다’. 댄의 가방을 뒤져 그가 어떤 샌드위치를 좋아하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한다. 응급실 의사인 래리가 앨리스를 진찰한다.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보다 그 위에 난 더 오래된 상처에 주목한다. 앨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문가인 래리는 금방 알아차리지만 그래서 그게 뭐.
이렇게 사랑에 빠진 후 댄은 앨리스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드디어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 것이다!
책에 사용할 사진을 찍기 위해 안나를 만난 댄은 이번에도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우연히 사고처럼 찾아오는 것이니까. 앨리스의 존재 때문에 댄을 밀어내는 안나. 댄은 그런 안나의 이름으로 음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채팅방에서 래리와 대화를 나눈다. 댄과 래리의 역할극. 여기에는 어떤 진실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현실에서 만남을 갖기로 한 채팅창 안의 안 나와 래리. 그리고 현실의 안나와 래리가 만난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던 거짓을 걷어내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렇게 댄과 앨리스, 안나와 래리의 이야기가 질 낮은 섬유처럼 들쑥날쑥 얽히기 시작한다.
상당히 많은 줄거리를 이야기한 것 같지만 연극을 소개하는 시놉시스에 나와있는 딱 그분까지만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스포가 될 위험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사랑과 소통, 진실에 대해 생각하라고 주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줄곧 사랑한다고 말하고,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말하라고 다그친다. 덕분에 110분 정도의 공연 시간 막바지에 이르면 ‘저렇게까지 사랑만 해서야 사람이 살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금 질린다고 해야 할까.
이 연극은 영국 작가 패트릭 마버(Patrick Marber)가 1997년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꽤 오래 전인 1997년에는 스트립퍼 출신의 앨리스가 그래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 같다. 2004년 나탈리 포트만이 앨리스 역으로 나오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역시 나탈리 포트만의 스트리퍼 연기가 화제였다. 영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하지만 이 연극에 대해 말하자면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작가이자 배우이기도 한 패트릭 마버는 아마도 198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라는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오션스 11],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 같은 유명한 영화를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의 첫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에는 제목과 달리 섹스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 대신 사랑과 섹스, 진실과 거짓말에 대해 묻는다. 이 연극 [클로저]처럼 말이다.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는 거짓말을 하다 성불능이 된 남자가 등장한다. 섹스와 거짓말이 이렇게 연결된다. 마침내 주인공이 진실을 말하는 방법을 찾게 되면서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랑이 섹스인 것인지 혹은 사랑은 그런 문제와는 관련 없는 고차원적인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에 진실함이 동반되어야 함은 명확하다. 이 연극 클로저가 끝까지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늘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도 같다. 여러 가지로 곤혹스럽고 난감한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작은 무대는 길에서, 병원으로, 안나의 작업실에서, 안나와 래리의 집으로 바뀐다. 관객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관객도 이런 종류의 상상에는 익숙하다. 장소쯤이야. 하지만 앨리스의 화려함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진살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어떻게 보면 가장 진실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앨리스의 화려함은 이 연극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그 부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안나역의 이진희 배우의 연기가 인상에 남았다. 사랑 앞에서 갈팡질팡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찌질한 나쁜 놈인 댄 역의 최석진 배우는 자신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다만 이 멋진 연기들이 첫 공이기 때문인지 뭔가 어색하고 합이 맞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잘 되겠지.
말하자면 이 영화는 1990년대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이 신문의 역할을 이미 인터넷이 대체했고, 스트리퍼보다 더한 자극이 흔하게 널려 있는 2020년대에 이 연극이 특별하거나 유혹적일 이유는 없다.
다만 근본적인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 곁에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건 그렇다 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진실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아마 우주가 끝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던지고 있는 이 연극은 7월 14일까지 플러스 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