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석 안 쪽으로 긴 무대가 쭉 뻗어 있다. 직선의 끝은 관객석 뒤로 이어져 돌아간다. 관객석 바깥의 무대다. 무대 위에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감잡을 수 있는 어떤 힌트도 없다.
바깥 무대의 벽에는 [당연한 바깥]이라는 제목이 떠 있다. 그 아래 [OUTSIDE, NATURALLY]라는 영문 제목이 함께 적혀 있다. '당연한 바깥'이라는 말은 '바깥, 자연스럽게'라든가, '당연하게도 바깥'처럼 이해되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들은 누구일까, 바깥에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암전 후 밝아진 무대 밖으로 "2000년대 주중 스페인 대사관"이라는 문장이 떠 있다. 무대 위에는 깔끔하게 양복을 입은 남자와 허름한 옷을 입은 여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을 돌린 여자가 입을 열자 북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또박또박 서울 말씨로 대꾸하는 남자는 남한의 정보원이다.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든 탈북민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제야 감 잡을 수 있었다.
오래전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스쳐 지난 적이 있다. 탈북민 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은 탈북민 20여 명이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들어간 사건 말이다. 혹은 중국 내 북한 식당의 종업원들이 단체로 귀순한 일도 있었다. 당시 귀순한 것으로 알려진 종업원 중 몇몇은 공작에 의해 남한으로 오게 된 것이라며 다시 북송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국가정보원의 대북 공작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남한 땅으로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던, 망망대해에 몸을 싣고 표류하다 구해지던,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몇몇 나라의 국경을 돌아 돌아 남한에 들어오던 이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국정원 직원들이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와 같은 민간인은 알지 못한다. 기획인지 음모인지, 그것도 아니면 기적인지 나와 같은 민간인은 판단할 수 없다. 정부가 말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믿거나 혹은 뿌연 의심의 안개를 드리운 채 받아들일 뿐이다. 진실은 절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허름한 옷을 입고 북한 말투를 쓰는 저 등장인물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여자는 방금 아이를 놓쳤다.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오는 긴박한 순간 잡고 있던 딸의 손을 잃어버렸다. 덕분에 여자는 스페인에, 여자의 딸은 중국에 남겨진 꼴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여자의 딸을 북한으로 송환할 것이다. 스페인 대사관으로 찾아온 정보부 직원에게 여자는 딸을 구해줄 것을 요청한다. 딸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사정한다. 이렇게 연극은 시작된다.
눈앞의 무대 위에서 극이 진행되지만 또한 등 뒤 무대에서도 연결되는 것처럼, 눈앞에 드러난 사실 밖으로 또 다른 진실이 놓여 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좀 전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처음 관객에게 알려졌던 사실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 의해 다르게 윤색되고 그다음 등장인물에 의해 다른 모양으로 드러난다. '1+1=2'처럼 단순하게 보이던 수식이 더 복잡하고 미묘하게 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내심을 숨기고 과거를 감춘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한 겹 한 겹 겹쳐지면서 거대한 줄거리를 만든다. 연기를 떠나 줄거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흡입력이 있는 무대다.
이 연극에는 총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탈북자이거나 그와 관련된 사람이다. 그들은 관객석 안쪽 무대를 거닐다 바깥의 무대로 뛰쳐나가거나, 안쪽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동료를 바깥 무대에 서서 지켜보기도 한다. 인물들은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모종의 임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다시 들어간다. 문제는 그들이 드나든 방식이 형편없이 좁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갈라진 바위틈처럼 좁은 길로 오가는데, 긁히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있겠어?
이 대사가 이 길의 고단하고 지난함을 엿보게 한다. 인물들은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쓰러진다. 내용과 형식을 통해 '당연한 바깥'이라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여자 역할의 강지은 배우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북한 사투리를 잘 모르지만 이따금 귀에 걸리는 말투가 있었다는 것은 숨기지 않겠다. 종우 역의 우범진 배우와 서진 역의 김효진 배우, 의사 역의 공상아 배우 역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단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인물들은 경계를 오가며 다른 생각을 품고 감정을 느끼며,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경게 바깥에 서 본 이후에야 경계 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
이건 여진일까요?
... 전조 같은데요.
세계에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혹은 바깥에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암석처럼 단단해 보이는 우리의 바닥은 지진과 같은 재해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린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불행한 일의 그늘일 수도 행복한 일의 예감일 수도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또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인 연극은 8월 4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