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시간에 갑자기 폰이 울렸다. 몇 달만에 온 전화라 어떤 인사말로 대화를 시작해볼까 고민하며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울음 섞인 목소리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덕분에 난 평소 대화하던 것처럼 어색하게 더듬으며 인사를 했고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안녕하지 못하더라. 갑자기 앞도 뒤도 없이 내가 그런 여자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으나 곧 대답했다. 그런 여자 맞다고. 그러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고 그렇구나 라는 허탈한 대답과 함께 잘 자라는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가 끝났다.
그녀는 나에겐 애증의 상대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상대였으며, 말 한마디로 내 감정 상태를 동전 뒤집 듯이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몇 년 동안 괜히 혼자 맘고생한 탓일까. 맘에도 없는 못된 말을 해버렸다. 단지 너무 힘든 마음에 위로를 받고 싶어서 나한테 연락한 사람한테. 나는 10년 넘게 쌓아온 둘만의 믿음을 배반해 버렸다.
20대가 된 이후에 우리는 일 년에 두세 번, 그것도 그녀가 나에게 연락할 때만 문자나 통화를 했다. 내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않을 건 알지만 왠지 거절당하는 게 두려웠고 구차하게 매달리는 듯한 착각이 됐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에 했던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던 걸까. 괜한 자격지심과 자기 비하를 품은 20대의 나는 그녀를 아무렇지 않은 척 대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했다. 내 입이 했던 말들 중에 제일 더럽고 치졸한 말이었다. 겨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그날 이후로 매일 후회하고 고민하고 생각했다. 언젠가 연락이 오면 그때 했던 말은 거짓이었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이다.
그 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나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란 인간은 미안할수록 먼저 연락을 못 하고 사과의 말은 더욱 하지 못 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혼자인 시간이 되면 그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2, 3년쯤 지났을 때 드문드문 보던 그녀의 SNS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봤다. 불현듯 밑바닥에서부터 미련이 솟아올랐다. 결혼식에 몰래 가서 보고 올까. 아니다, 태연하게 축하한다는 인사만 하고 오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결혼식이 일주일쯤 남았을 때였다. 하루 종일 갈등을 하는 내 맘이 힘들어서 동네에 친구가 하는 술집에 갔다.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결혼식에 갈지 말지 고민이 된다는 말을 했다. 친구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소식을 접할 때부터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참고 있었다. 당연히 가지 말라는 대답을 해줄 친구에게 물어본 건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나를 아껴주는 친구가 해준 말이니까 혹시라도 갈 마음이 생기면 이 걱정 어린 위로를 떠올리기 위해서.
그 날부터 내가 그녀에게 했던 그 한 마디가 하루 종일 떠올랐다. 정말 잠시라도 쉬는 순간이면 그 생각이 떠올라 처리해야 할 업무를 자꾸 다시 하게 됐다. 이러다 내가 아는 모든 게 잊혀지고 그것만 머릿속에 꽉꽉 채워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됐다. 결국 그즈음엔 야근도 자주 했다. 그녀의 결혼식 하루 전날엔 퇴근하고 한없이 안양천 길을 걸었다.
다음 날 퇴근을 하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집으로 갔다. 책상 의자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다가 예식 시간이 끝났을 무렵 문득 서운했다. 그래도 결혼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 이후로 나는 정말 잊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에 있던 유통기한이 지난 맥주 한 캔을 마셨다. 그리고 새벽 3시까지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그리다 잠들었다. 다행히 그날은 어머니가 내 방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 날도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