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로스 Jan 11. 2019

돈이 좋아질까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돈이 풍족했던 적은 없다. 초등학교 때 용돈이 필요해서 달라고 할 땐 다양하고 합리적인 핑계를 대려고 머리를 굴렸고, 처음 월급을 받고 와이프를 만나기 직전까진 항상 집안 빚을 갚는데 거의 모든 돈이 나갔다. 그러다 스물다섯 살 때 대출금들을 갚는 시점이 겹친 날이 있었다. 


월급을 받기 시작한 후부턴 내가 사고 싶은 걸 제대로 사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날은 일탈을 하고 싶었다. 책 한 권 사고 동네 포차에서 술 한 잔 할 돈은 뺄 각오를 했다. 딱 오만 원만. 그런데 순식간에 모두 빠져나갔다. 잔고는 어느샌가 0원.


어이가 없어서 시간도 기억한다. 딱 3분 걸렸다. 잠시 고민을 한 사이에 그럴 줄은 몰랐다. 순간 무릎이 살짝 꺾이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일하던 직장 복도 끝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숨을 쉬었다. 물건을 쌓아놓는 곳이라 먼지가 참 많았다. 창가에서 비치는 햇살에 비친 먼지가 멋있다는 생각이 든 건 참 웃기지만.


그다음 날이었던가, 오랜만에 부모님이 내 앞에서 소리 내며 싸우셨다. 어쩌다 내가 모은 돈 얘기가 나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모은 돈이 없다는 얘길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언성을 높이며 나를 나무라셨고 어머니는 오랜만에 높은 소리로 한 마디 지르셨다.


원금이랑 이자 내느라 어제 내 월급을 다 쓰고도 모자라서 더 냈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마지막 표정 그대로 대답을 못 하셨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입에선 차마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를 따라나가서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냥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없이. 


배가 고파서 밥 먹기 전까지 나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살아서 이 꼴이라고 말이다. 현실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매일 하지만 항상 이상적인 것만 꿈꾸며 살아왔다. 그걸 이루지 못해서 결국 게을러졌다. 핑계가 가득한 무기력증이다. 저녁에 자반고등어랑 따뜻한 쌀밥을 먹으면서 다시 기운이 나서 다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면 30년 정도. 그동안 나를 위해 쓰는 건 아까워하는 습관이 들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지출이 낭비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 밥 먹을 때는 대부분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 아니면 편의점 도시락 정도였다. 웃긴 건 주변 사람들에겐 고기를 잘 사줬다. 무리를 해서라도 상대를 먹이고 대화하는 게 참 즐거웠다. 그러고 나면 그 달엔 책 한 권도 사지 못 했다.


그럼 다시 자괴감이 들기 시작한다. 돈도 적으면서 왜 계획적으로 쓰지 못했나. 통장이 비어서 연애할 생각도 애써 꾹꾹 누르면서 왜 진급하거나 다른 기술을 배울 생각을 안 하는지. 빚 갚는 중이라도 비상금은 모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지만 결국 또 누군가에게 고기를 사주고 만다.


아마 자학이자 대리만족이자 일탈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못 만난다는 걸 못 견딘 것이다. 돈 없으면 얻어먹어도 될 텐데 잔고가 비어갈수록 왠지 더 얻어먹기 싫어지는 이 청개구리 심보란. 보통 그렇게 나쁜 소비를 하며 지내왔다.


얼마 전에 허리가 갑자기 아팠다. 허리 통증도 문제지만 오른쪽 다리 통증이 너무 심했다. 1분 이상 못 서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시술을 받았다. 하루 동안 입원하고 시술을 받고 몇 번의 도수치료 비용까지 포함해서 대략 250만 원 정도의 신용카드를 긁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 중에 나만을 위해 십만 원 이상 써본 적이 없는데. 참 큰돈을 쓰고야 말았다. 기분이 참 묘했지만 카드 청구서를 받기 전까진 기분이 좋을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 마음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