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현 Apr 21. 2017

크레페 케이크

폐업과 취업 그 사이

“그러니까... 내가 이만 원을 넣겠다고요!”

“안됩니다. 고객님 10만 원부터 인출이 가능합니다.”

절규인지 애걸인지 모를 소리가 나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십만 원 때문에 십 분이 넘도록 이러고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제발요… 저희 회사 이제 폐업한다 말이에요. 2만 원 제가 입금할 테니 10만 원으로 회식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네?”

“죄송합니다. 고객님. 10만 원부터 인출 가능하십니다.”

ARS도 이렇게 쌀쌀맞을 수는 없을 텐데. 그 기세에 눌려 전화를 내려놓는다. 분하다.

“씨발… 씨발…!”

인출이 안된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인지 지난 일 년간 벌어들인 돈이 8만 원뿐이라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인지 헷갈렸다. 광고 수입은 10만 원부터 인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예외를 만들어 줄 수는 없냐고 인정을 구한 것뿐인데... 모레면 같이 창업을 했던 이들도 떠난다. 준비 기간부터 하면 일 년 반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 번번한 송별회도 없이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래도 마침표는 찍고 싶었는데… 사업을 닫을 때에는 구분점도 마침표도 허락되지 않았다.


폐업을 마음먹은 것은 한 달 정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장맛비가 몇 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리던 때, 여름 답지 않게 어둑어둑한 초저녁 이른 시간 불쑥 집에 돌아갔다. 태어난 지 일 년이 조금 넘는 둘째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아내는 식탁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틈 사이로 아내가 뭔가를 후다닥 두꺼운 책 밑으로 숨기는 것이 보인다.

“나 왔어!”

사업은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졌고, 이제는 출구를 찾아야 할지 막 다른 길에 주저앉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되었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들어간다. 습하디 습한 조그만 거실에서 둘째는 잘도 잔다.

“에어컨은 왜 안 틀었어?”

아내는 대답 대신 ‘어, 왔어?’라는 무표정한 대답을 낸다. 눈 맞춤도 없이.

평범함 저녁이었다. 저녁을 차리고, 저녁을 먹고. 첫째와 둘째를 차례로 씻기고 밤이 늦기 전에 재운다. 아이들이 잠에 들고 나는 거실 구석에서 책을 보는 척한다. 사실 내 귀에는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내가 두꺼운 가계부 아래 감추듯 쑤셔 넣은 종이 쪼가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이들의 재롱에 기분이 나아진 듯한 아내가 먼저 잔다고 하고는 기운 없이 웃는다. 나는 침대 방의 작은 에어컨 저도는 좀 틀고 자도 되지 않겠냐며, 잘자라고 아내를 들여보낸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 척 하지만 사실 빗소리만 듣고 있는 중이다.

밤이 깊어 가면서 창 밖으로 들리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잦아들었다. 아내도 깊이 잠든 듯했다. 빗소리에 나의 발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건만 까치발로 식탁 쪽을 향한다. 조심스레 가계부를 들어보니 흔히 ‘똥 종이’라 불리는 종이 한 장이 깔려있다. 관공서에서 받았을 법한 신청서였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위한 신청서였다.


그 이후 나는 회사를 접기로 했다. 동료들은 이유를 몰라했다. 당장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도 닥치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계속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했을 때 아이처럼 좋아하던 아내의 얼굴이 밟혔다. 회사를 차린 후 아무런 불만 없이 참던 아내가 이제야 안도한다는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는데... 나는 동료들에게 재차 양해를 구했다. 결국 동료들은 스타트업 바닥에 남기로 했다. 혼자만 빠져나오는 듯 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사업 기간 동안 우리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진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무엇이 잘못이었길래 그토록 우리는 한 방향으로 뭉치지 못했던 걸까?

이렇게 동료들과 의견을 좁히고 거취를 정하는데만 꼬박 두 주가 걸렸다. 흩어지는 데에도 이렇게 의견 일치가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 맺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의 해체 소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 스타트업 경진대회 본선에 올랐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개발자가 많았던 팀이어서였을까?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빠르게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날 수 있었다. 나 혼자만 남겨졌다. 폐업을 위해서.

다른 해 보다 장마가 짧았다. 장마 이후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자 혼자 남은 사무실은 불구덩이 같았다. 그곳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조그만 방에 가까웠다. 돈을 아끼자며 구했던 쪽방. 이곳에서 처음 여름을 보낼 때에는 더운 줄도 몰랐는데 지금의 습기와 더위는 일 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지금 벌 받는 것이다. 나의 실패에 대한 벌이다.’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중에 고인 땀을 후- 후- 불어 본다. 아내 보기에 민망해서 아직 회사에 다니는 모양새를 낸다며 긴 바지에 셔츠를 입고 나온 스스로가 한심하다. 일 년 반 동안 쌓인 장부를 정리한다. 기술 보증 기금에서 빌린 돈과 통장에 남은 돈을 한 곳에 모아 상환 계획을 세운다. 중고 가전, 가구에 전화를 걸어 견적을 떼 달라고 한다. 간식이라도 먹으려면 하나 있는 게 낫다며 구입했던 전자레인지와 전기 포트는 값도 못 매긴단다. 그나마 책상과 의자는 값을 쳐준다고 하는데 친구들이 성공하라며 선물로 들여온 것들이라 팔지 고민이 된다. 부동산에 가서 회사가 망했다며 계약을 좀 일찍 당겨 줄 수 없냐고 사정한다. 하필 계약을 갱신한 것이 두 달 전이다. 남은 10개월을 마저 사용하던지, 다른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돈을 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을 혼자 남아 꾸역꾸역 한다. 많은 일이 아닌지라 대부분 책상에 앉아 멍하니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마음 속으로 자책하고 푸념하다보면 그나마 시간이 좀 빨리 가는 듯하다. 이러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으면 창밖을 본다. 저 거리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싸지... 오늘은 집에 멀쩡한 얼굴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제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하는 두려움에 그 찌는 더위 속에서도 싸늘한 소름이 돋아 몸서리친다.


회사를 정리하기 시작하고 단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남은 것이라고는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컴퓨터 하나. 그 사이 정수기 렌탈도 끝이 났다. 이제 그 방에는 물을 마실 방법이 없어 아침에 집에서 빈 페트병 하나를 들고 나오는데 이미 며칠을 쓰고 닦지 않아 집을 나설 때마다 과연 이 물병을 다시 쓰는 것이 위생적 일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물을 담아 나오는데 오전이면 그 물이 다 떨어진다. 물이 떨어질 때면 헬스장으로 향한다. 일 년 전, 아직 돈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막연한 낙관으로 할인 행사 중이던 연간 회원권을 구입했다. 할인에 더해 두 달을 더 다닐 수 있는 상품이었다. 헬스장에 가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으니 좋다. 한 시간 정도 머물면서 수시로 물을 보충한다. 단백질 보충제를 가득 채워와 ‘으악!’하는 기합을 지르며 운동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나는 물배를 채우며 고개를 숙인 채 아령을 든다. 


직장인들로 붐비지 않는 오전 11시 정도에 헬스장을 찾곤 했다. 같은 시간에 늘 보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역시 (일종의) 스타트업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남성연대’라는 조직을 이끌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회사를 접는 시기에 그도 조직 운영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재정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인터넷에 남성연대를 지키는데 본인의 목숨을 걸 테니 자기를 믿고 1억 원의 돈을 모아 달라는 글을 올렸다. 기대와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툭하면 목숨을 건다며 질 낮은 쇼는 그만하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절박해졌다. 재정 지원에 대한 호소의 글을 올리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는 한강 다리의 난간 위에 올랐다.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저 진정성만… 그는 카메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제보도 있었지만 거짓이었다. 어떤 이는 그의 몸이 운동으로 다져져 마치 이소룡과 같은 다부진 몸을 지녔기에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봐왔던 그의 몸은 꾸준한 운동 덕택에 나이에 비해 무척 다부졌다. 나 역시 왠지 그가 살아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를 걸었다. 그가 이끄는 조직의 이념도 목표도 동의할 수 없었고 그가 TV에 나와서 주장하는 것들도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절규하듯 외친 사업자금 1억 원의 희망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희망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느 날처럼 물을 채우려 갔던 헬스클럽의 TV속 뉴스를 통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그가 뛰어내린 지 나흘이 되던 날이었다.


법인도 닫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한 달의 임대 기간이 남은 쪽방, 컴퓨터 한대, 랜선 하나, 잔뜩 지문이 묻는 생수병 그리고 빚 7000만 원이었다. 얼른 직장을 구해야 했는데… 더위 때문인지, 경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기분 탓인지 입사 지원서를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다잡으려 매일 골방으로 기어 나갔지만 서너 시면 되면 술이 먹고 싶었다. 술이라도 먹고 신세 한탄을 하든 화를 내든 해야 살 것 같은데, 문제는 아무도 불러줄 사람도 부를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업 시작할 때 성공을 기원하던 친구의 대부분은 이제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 어떻게 나의 상황을 알아챘는지 나를 피하는 것만 같다. 한 때 한 인맥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마치 먹고 남은 생선 뼈 같은 신세처럼 앙상해졌다. 그 덕분에 사업 기간 내내 술은 멀리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사업도 접었고 사람들도 그리운데 같이 술한잔 마셔줄 사람이 없다. 땀에 전 손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간절히.


아니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떠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인연이 전부 끊어진 것은 아니어서 몇몇 친구들이 곁에 있어줬다. 그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삼일 굶은 개가 밥그릇 속 사료를 먹어 치우듯 눈이 뒤집힌채 내 자랑을 쏟아낸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술자리가 시작되면 게걸스럽게 내 자랑을 쏟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아니, 왜 그러는지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낮아져서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였을까? 고마운 나의 친구들은 망한 친구의 푸념을 그리도 잘 들어줬다. 나의 실패와 좌절에 함께 울어주었던 친구들은 또 얼마나 감사한가. 돌이켜 보면, 당시에 나는 통제 불능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왕년의 잘 나갔던 나를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나면 이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부끄러움과 자기연민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만다. 그렇게 만취가 된다. 다음날의 숙취는 얼마나 또 쓸쓸하던지…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인 사이트를 돌고 헤드헌터에게 이메일을 돌렸다. 우선 내가 다녔던 회사에 연락을 했다. 내가 돌아갈 터이니 뽑아 달라고 했다. 예전에 분면 뽑아준다던 그 사람들이 그동안 상황이 바뀌었다고, 미안하다고, 기운 내라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합격했던 회사들은 지금도 혹시 뽑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보냈는데 차례차례 탈락을 연락 해온다. ‘좆만아 인생은 실전이야’라는 이야기가 뇌리를 관통해 지나간다.

사업을 하기 전, 나는 획일성을 쫓아 평생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직장생활 10년에 다가서자 점차 그 획일성을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하게 되었다. 분명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 잘 산다고 했지만 직장인들의 생활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간혹 삶을 다채롭게 사는 이들이 있기도 했는데 그들이 다채로움을 얻는 곳은 회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이들이 마주하는 회사생활의 결말은 비슷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답답했다. (어쩌면 절망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회사가 인생을 바쳐 일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답안지가 '지루한 노년'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가는 나에게도 억울한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다. 나는 주위에 다양한 꿈과 인생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열심히 일이나 해’였다. 오기에 좋은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직원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일터가 만들어지면 회사는 자연스레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쨌든 그 확신을 실천에 옮기긴 했다. 비록 예상보다 더 이른 시기에 빨리 무너지긴 했어도 말이다. 어쩌면 일찍 무너진 것이 다행이었을까? 투자를 받기 위해 찾아갔던 VC 심사역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그만 두길 바란다. 더시간을 끌면 늦는다. 지금이라도 재 취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 창업자들이 3년 이내에 95%가 망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는 부채는 평균적으로 2.5억 정도가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뿐만 아니라 많은 VC들의 투자 여력이 많은 편이 아니다. 이미 검증된 팀에게는 투자가 몰리기 마련이다. 더 늦어서 재기 불능이 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다시 직장에 다녀라.”

그렇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확신은 들지 않지만 매몰비용의 오류에는 빠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8월 중순이 되자 날씨는 더 더워졌다. 골방에 앉아있으면 뺨을 타고 땀이 뚝뚝 흘러내린다. 식당에 갈의욕이 없는 것인지 식욕이 없어진 것인지 점심을 건너뛰는 것이 일상이 됐다. 식욕이 없다기보다는 ‘이런데도 밥이 넘어가냐?’는 윽박이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방에서 원서를 쓰고 이력서를 다듬은 지 한 달이 됐다. 스무 곳이 넘는 곳에 이력서와 원서를 전달했는데 단 한 군데에서도 얼굴 보자는 말이 없었다. 당시 나의 기분을 표현하기에는 의기소침이라는 단어도 자괴감이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다. 한여름 진흙밭에 발이 빠졌는데 도대체 발을 뺄 기력이 없어 속절없이 서있는 심정이었다. 땡볕 아래 진흙은 점점 굳어가는데 이상스레 다리는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아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생각 만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언젠가 친척의 생일 때 먹었던 크레페 케이크. 얊게 펴서 구워낸 크래페 사이사이를 생크림으로 채워 만든 크레페 케이크는 시원하게 식혀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자주 먹던 것도 아니고 서너 번 맛본 것이 다였는데 하루 열 번도 더 생각이 났다.

‘어디든 가게 되면 사 먹어야지… 지금은 아니다. 그때까지만 좀 참자…’

더위가 꺾인 8월 말이 되자 내 이름 석자 들이민 회사의 개수는 서른 개에 가까워졌다. 다행히 얼굴을 보자는 회사도 생겼다. 하지만 왜 사업을 했느냐는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나오거나 경력이 복잡하다며 면접이 싱겁게 끝나버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 달 반 전에 지원했던 곳인데, 실무자의 서류 검토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제야 연락을 했단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은 무난히 진행되는 듯했다. 다른 회사보다는 상대적으로 무난했다는 것이지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함께 나와 함께 면접 대상에 오른 사람의 경력과 스펙이 대단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미 면접이 시작되기도 전에 면접관들의 마음이 기운 상황이었다. 면접관들의 표정은 상냥했는데 뭔가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나를 떨어뜨리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안된 마음에 자비를 베풀어 다독이려는 것 같은 느낌?)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오른쪽에 앉은 면접관이 마지막 질문이라며 물어보았다.

“요즘 재미있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요?”

백수가 되고 나서 한 것이라고는 책 보는 일 밖에 없었는데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읊기 시작했다. 당시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봤던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과 제러드 다이아문더의 ‘총 균 쇠’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을 풀어놨다. 특히 총 균 쇠 이야기를 하면서, ‘문명이라는 것도 그런데 하물며 사업, 인생이라는 것은 우연의 숙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나름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렀으니 말이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어 진행된 임원 면접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상냥했지만, 사무적인, 혹은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분위기는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면접이 끝나려는 찰나 그 임원이 주섬주섬 종이 몇 장을 꺼내서 내 앞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혹시 이런 보고서를 본 적 있는가? 혹시 가능하다면 지금 이 보고서를 읽고 반박논리를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무슨 보고서인지 들여다봤다. 제목만 읽어도 그 보고서가 무슨 보고서인지알 수 있었다. 내가 예전 회사에서 작성했던 보고서였으니까. 창업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작성했던 보고서 중 하나였다.

“이거… 제가 만든 보고서인데요. 그래도 상관없다면 이 보고서의 반박 논리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만큼이나 면접관도 놀란 듯했다. 그 보고서의 작성 당사자가 앉아있을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설명이 끝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돌아가도 된다고, 이번 주 안으로는 결과를 통보해 줄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면접 이후 나의 생활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일어나면 씻고 아이들을 깨운다. 큰 아이가 아침을 먹고 나면 손을 잡고 셔틀버스를 타는 곳에 간다. 남자는 나뿐이다. 게다가 목이 한껏 늘어난 티셔츠에 검은색 매시 소재의 반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유괴범으로 오해받지 않는 것아 다행일 정도였다. 다른 아이의 엄마들이 궁금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시간이 지나니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생겼다. 아이를 보내고 나면, 막바로 생수병과 읽을 책 한 권을 챙겨서 사무실이라 불렸던 골방으로 간다. 전날보다 나아질 것 없는 일과가 시작된다. 아니 정확히 똑같은 일과가 반복된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채용 사이트와 서치펌, 기업 채용 공고를 확인하러 돌아다닌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지푸스가이런 느낌이었을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과정을 매일매일 되풀이한다.


9월이 되자 더위가 한결 수월해졌다. 골방의 계약은 종료되었다. 컴퓨터 한대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시지푸스의 활동 무대가 골방에서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다. 아, 하나 더,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일상의 작은 변화였다. 아이의 말문이 트여 제법 눈 맞추고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던 시기라 아이와 있는 시간이 좋았다. 아내는 일거리를 구하겠다고 돌아다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낮 시간에는 작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느 날 오후 처럼 그렇게 둘이 집에 있는데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희 회사로 오시기 전에 처우 협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후 전화 넘어의 사람으로부터 무어라 안내가 이어졌지만 들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이메일로 부탁드립니다.’라는 대답을 하고 황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쁘지 않았다.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 살았다는 안도뿐이었다. 이 소식을 전할 누군가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려 놓은 전화를 다시 들어 번호를 눌렀다. 케이크 집으로...

“저… 크레페 케이크 얼마나 하나요?”

“33,000원입니다.”

“하… 하나만… 사고 싶은데… 지금 가도 될까요?”

“네 오세요 포장이시죠?”

“네…”

33,000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남은 잔돈과 은행 통장 잔고를 다 털었다. 그래도 만원이 부족해서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겨우 33,000원을 만들었다. 낮잠을 자고 있는 둘째를 아기띠에 올려 안는다. 다행히 깨지 않는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의 도로에 아이를 안은 남자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을 번들거린 채 바삐 걸어간다. 아이는 깨지 않고 잘도 잔다. 남자는 천사처럼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내 다시 웃고는 바쁜 걸음을 옮긴다.

작가의 이전글 상식과 통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