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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Oct 26. 2019

<조커>에도 윤리가 있다면

<조커>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조커>에도 윤리가 있다면

-<조커>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늦은 밤 거울 앞에 앉은 사내여, 왜 웃느냐

너는 대체 왜 웃는 연습을 하느냐

- 박성우, <웃는 남자>


[Opening]

   거울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양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꼬리 안으로 넣고는 거칠게 들어 올린다. (얼굴은 웃지 않는데 입은 웃는다) 그리고 눈에서 한 방울 흘러내리는 눈물.

   그리고 암전.



영화 <조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 웃음을 머금는 영화 <조커>의 오프닝 신은 사실상 <조커>의 전언과도 같다. 그는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는다. 웃으면서 운다는 것은 그의 웃음이 실은 ‘울음’에 가까울 정도로 흐느끼기 때문이고, 울면서 웃는다는 것은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라는 자각을 그가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웃음은 울음이고, 울음은 웃음이다. 이 둘 사이의 서늘한 낙차로부터 관객은 기묘한 쓸쓸함과 애처로움을 감각한다.


<조커>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는 것

   한 지인에게 <조커>를 어떻게 봤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되돌려줬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굉장히 위험한 영화 같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보면 큰일 날 것 같다. 동정심을 유발해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것 아니냐.” 존중받아 마땅한 생각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극장 입장 시 일제히 총기 검사를 할 정도로, 모방범죄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 <조커>를 둘러싼 모든 경계와 우려의 출발은 영화가 가진 극단적인 폭력성이고, 수렴조차 광적인 폭력성으로 맺는다. 


   그러나 존중받아 마땅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그 생각이 <조커>에 대한 올바른 해독일까. 그럴 수 없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이미 항변한 바와 같이, ‘영화는 영화일 뿐’이며 “<존 윅3: 파라벨룸>의 경우 한 백인 남자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때 관객은 그걸 즐기고 응원을 하는데, 왜 <조커>만 그것과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라는 동어반복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잣대를 영화의 잣대에 대지 말라는 전언일 것이다. 이 같은 논란을 감독은 미리 의식했는지, <조커> 내부에도 안전장치를 하나 더 두었다. 에필로그 부분인데, 상담사와 대화를 나누는 아서는 문득 웃는다. 재미있는 조크가 하나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어차피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는 자신의 조크를 숨긴다. 이 부분은, 이전까지 조커의 모든 악행과 살인, 스스로 폭동의 아이콘인 ‘조커’가 되었다는 내용이 ‘아서의 조크’ 일 가능성으로 둔다. 현실과 영화는 다르므로(‘영화는 영화’), 영화 안에서도 끔찍한 내용은 ‘조크’였으므로(‘조크는 조크’) 영화에 가하는 비도덕적인 비난을 피하는 동시에 영화 해석의 입체성을 두는 감독의 포석일 것이다.



영화 <조커>



   그러니 <조커>는 ‘조커’대로 보면 어떨까.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말한 밀란 쿤데라식으로 말하자면, 영화도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 이 세계에 발을 딛는 순간 현실에서의 도덕 체계를 조금 내려놓고, 영화 내적인 체계를 그저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 때로 ‘비도덕적’인 영화는 극단적인 충격으로 위선적인 도덕의식을 성찰하게 만드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영화 <조커>에 대한 판단기준은 ‘이 영화가 얼마나 폭력적인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영화의 기획된 폭력이 공동체의 선을 성찰하게 만드는가’라는 데 있을 것이다. 김병규 평론가에 의하면, 이 기획이 <조커>에서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는 “도발적인 영화란 공동체의 의미망에 무사히 안착하는 진부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패러독스를 다룬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조커>는 전자에 해당하는 평면적인 초상의 영화이자, 상투적인 어둠에 붙들린 영화이며, 반동적인 흥분으로 도취된 영화다.”(김병규, 씨네 21, <조커>의 폭력, 엉성한 난장)


   그의 의견의 취지는 공감하나, 내용은 동의하진 않는다. 바로 앞에서 나는 <조커>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영화의 기획된 폭력이 공동체의 선을 성찰하게 만드는가’에 있다고 적었지만, 그것만이 영화 <조커>를 판단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라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커>는 폭력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현실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실천적인 윤리를 제공한다고 나는 믿는다. 


<조커>에 대해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

  <조커>의 시나리오 제목은 <JOKER; An Origin>이었다고 한다. 조커의 기원, 탄생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영화는 ‘조커가 어떻게 태어나게 됐나’를 보여준다는 것. 그런데 조커의 탄생은 반대로 아서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서는 어떻게 죽게 되었나’를 중심으로 관람하는 것도 유효하다는 것. 이는 아서의 종말과 조커의 기원이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서는 어떻게 죽어갔나. 영화에서 아서는 누구에게도 따뜻한 공감을 받지 못했다. 그의 아픈 내면을 누구보다 경청하고 이해해야 할 사람인 상담사는 형식적이고, 엄마는 무관심하다. 사회 동료와 사람들 모두 그의 고통과 억울함을 보고도 위로의 말 조차 건네지 않는다. 사랑이 없을 때, 한 인물은 파괴되어간다. 삭막한 세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양분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서의 폭력을 비난할 수 있다면, 먼저 아서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들에게도 같은 비난이 돌아가야 한다. 결국 폭력이 폭력을, 악이 악을 낳은 셈이다. 영화는 한 인물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추적한다.


   이 영화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버드맨>이 떠올랐다. <조커>와 <버드맨>의 공통점이 의외로 꽤 있었다. 먼저 두 영화 모두 비로소 ‘조커’와 ‘버드맨’이 되는 영화다.(영화 <버드맨>의 엔딩은 리건이 황홀하게 비행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두 사람이 ‘조커’와 ‘버드맨’으로 거듭나는데 일종의 신호를 주는 소품은 ‘총’인데, 둘 모두 자신의 총을 격발 한 뒤에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영화 <버드맨>



   <버드맨>에서 리건(마이클 키튼)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에 뛰어들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풀리지 않자 결국 연극 공연 중에 실제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다행히도 총알이 그의 코만을 스쳤고, 결국 그는 아무런 생명에 지장 없이 병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연극은 예기치 않게 ‘극사실주의의 명작’이라는 평단의 극찬을 받게 되고, 그토록 그가 원하던 명예를 되찾은 것. 그리고 그는 진정한 ‘버드맨’이 된다. 한편, <조커>에서 역시 아서가 ‘조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순간은 총알이 격발 되는 순간인데, 생방송으로 이루어지는 머레이 쇼에 출연해서 진행자를 총으로 쏨으로써 ‘나도 조커다’를 외치는 무수한 시위대들에게 결정적인 아이콘으로서의 ‘조커’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조커가 되는 것, 버드맨이 되는 것 두 가지 모두 자신의 의도, 노력과 무관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오히려 둘은 조커/버드맨이 되는 데 있어 실은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한 사람(리건)은 얼떨결에 잘못 쏜 총알에, 또 한 사람(조커)은 세상의 호명에 둘은 다시 태어난 셈이다. 영화 <버드맨>의 영어 제목은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인데, 이를 번역하면 “버드맨 혹은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이다. 결국 한 개인이 정체성을 갖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음’, ‘무지’, ‘아이러니’ 같은 것에 달려있다고 두 영화는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삶의 역설과 부조리 앞에서 무용하고 무력하다는 존재라는 것. <버드맨>은 천사가 우는 방식으로, <조커>는 악마가 웃는 방식으로 삶의 아픈 진실을 드러낸다. 아픈 진실 앞에서 한 영화는 울고 한 영화는 웃는다. 두 영화가 짓는 표정은 다르지만 이것이 세상의 부조리와 신의 불합리에 대한 항의의 차원에서는 같다. 



<조커>가 의도치 않게 주는 윤리

  어떤 사람은 <조커>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어낸다. 기존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영화 속 내용을 통해 현실의 정치질서를 성찰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인물의 심리를 깊게 다뤘다는 면에서 잘 만든 심리드라마로 이해한다. 모두 좋은 독법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남는 것이 있다. 아서의 죽음을 이해했다면, 이제 조커의 탄생을 이해할 차례다. ‘조커’라는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조커라는 존재가 아직 불편하고 부담스러운가.



영화 <조커>



   영화 속 조커가 사회질서를 전복하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을 살인하는 것이 당신에게 그렇게 불편한가? 나를 곤경에 빠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어디 조커만의 것인가? 알베르 카뮈는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사르트르의 <벽> 서평, 전집 18)라는 문장을 쓴 바 있다. 그는 우리와는 달리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다 신형철의 문장을 인용하자. 조금 길지만 그의 문장을 전부 가져오겠다.


“어디선가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조커>를 보고 우리가 해야 할 물음은 ‘조커가 왜 이렇게 폭력적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타인에 대해 왜 이토록 폭력적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윤리라고 나는 믿는다. <조커>는 이 윤리를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201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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