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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Dec 26. 2019

더 나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영화 <미스터 노바디>가 묻고, 『모든 것은 빛난다』가 되물은 것


더 나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영화 <미스터 노바디>가 묻고,『모든 것은 빛난다』가 되물은 것




   살면서 선택을 앞두고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망설임은 아마도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행복일지, 불행일지 미리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롯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어떤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모두 예상할 수 있다면? 그러고 보니 선택의 결과에 대한 전제가 잘못 설정되었다. 행복과 불행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택마다 비슷한 비율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하건 비슷한 행복과 비슷한 불행이 따라오게 되어있다면, 선택을 앞두고 그가 망설이는 것은 어느 선택이 ‘더 나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망설임은 뒤의 결과를 몰라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의 일을 어느 정도 예상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는 다만 행복과 불행의 비율을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선택에 관해 느닷없는 추론을 시작한 이유는, <미스터 노바디>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9살의 니모(자레드 레토)는 이혼하는 부모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영화는 선택의 압박감을 주기 위하여 특별한 상황을 설정하는데, 이런 것이다. 기차가 출발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엄마는 몸을 내밀어 니모를 크게 부른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니모는 뒤늦게 기차를 따라 달리는데 이번에는 아빠(리스 이판) 쪽에서 ‘니모’라고 부른다. 자 니모, 누구를 선택할래. 기차는 지금 계속 달려가고 있는데. 



영화 <미스터 노바디>



   영화 초반에 나왔던 이 장면은 후에 밝혀지지만, <미스터 노바디>에서 니모에게 일종의 원체험적인 성격을 지닌다. 트라우마처럼 그 일이 니모에게 상흔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다중적인 삶의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니모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그의 삶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리드미컬하게 교차편집해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엄마를 따라 기차에 올랐을 때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또는 아빠와 함께 그 자리에 남았을 때 그는 어떤 삶을 사는지. 처음 두 갈래로 뻗어나갔던 그의 삶은, 두 선택지 안에서도 다중적인 갈래로 뻗어나간다.(영화 초반부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것은 영화가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니모의 삶을 순차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영화만의 기준으로 ‘배열’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익숙해지면 영화의 플롯은 다소 모호하긴 해도 그리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점인데, 9살 니모는 자신이 겪을 ‘미래’의 삶을 ‘과거’에 모두 이미 살아봤다는 것. (또한 그는 예전에 겪었던 자신의 ‘기억’을 미래의 일로 ‘예상’하기도 한다. 이 두 문장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밝히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이 글의 목적과는 무관한 작업이 될 것이므로 일단은 영화 속 하나의 규약code 이라고만 해두자. 두 문장의 모순은 ‘시간’과 관련돼 있는데, 영화는 이에 관해 ‘초끈이론’이라든지, ‘양자역학’이라든지의 과학적 이론을 차용하여 자유자재로 변용한다.) 그러니까 기차역 플랫폼에서 아빠와 엄마,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9살의 니모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미래의 삶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아이는 선택의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와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모두 알기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이는 두 가지의 삶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인지 확신하지 못할 뿐이다.


   영화가 ‘선택’에 관한 딜레마(결과를 모르는 것과 아는 것)만을 다뤘다해도 충분히 좋은 작품으로 내게 인식되었겠지만, 나는 니모의 선택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하나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을 향해 가는 엄마(탑승 수단을 기차로 설정한 것도 인상깊다)와 제자리에 선 아빠, 아이는 기차를 향해 달려가다 말고 돌연 제자리에 멈춘다. 그리고 그는 앞도, 뒤도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옆으로. 그리고 아이는 수풀 사이에서 낙엽 하나를 줍고, 니모의 입김에 날아간 낙엽은 이전의 갔던 곳이 아닌 곳에 당도한다. 그로부터 니모의 삶은 이제껏 살았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이런 결말과 함께, “이 모든 삶이 진짜야. 모든 길이 다 올바른 길이야.”라는 극 중 니모의 대사로 인해, <미스터 노바디>를 ‘모든 선택이 다 옳으니 미련갖지 말고 네가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하라.’라는 뭉근한 휴머니즘적인 메세지를 가진 작품으로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결국 니모도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았나? 그건 삶에는 옳고 그르다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더 나은 삶'이 있다라는 전제다. 니모는 바로 그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그에게 전혀 다른 삶을 가져다주었다. 선택이 곧 삶이라는 것.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은 내게 이런 질문을 가져다준다. 당신은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 알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왜 그 삶을 선택했나요? 이것은 결국 인생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 아닌가.




영화 <미스터 노바디>



   삶에는 더 나은 삶과 덜 나은 삶이 있는데 니모는 수많은 자신의 삶 중 자신에게 가장 나은 삶을 선택했다. 극 중 니모는 미래의 일을 겪어봤으므로 자신에게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만을 사는 우리 같은 범인의 경우라면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갈림길에서 대체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우리는 답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쓴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책) 그러니까 현대인은 ‘바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내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선택이 어렵다는 것. 여기에서 ‘선택’을 삶이라는 조건 아래에 두고 말하면,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더 나은 삶을 선택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근거를 ‘삶의 의미’라고 해두자. 그러니까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결국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느낀다는 것. 그래서 책의 저자들은 이런 상태를 ‘허무주의’라고 진단한다. 여기에서 빠져나가려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삶의 의미’라는 것이 결국 자의적인 해석에 달려있지 않냐고 믿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펄프 픽션>(1994)에서 줄(사무엘 L. 잭슨)과 빈센트(존 트라볼타)에게 여섯 발의 총알이 발사됐지만 그들은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일 뿐인가, 또는 어떤 ‘신적인 배려’일까. 물론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연출한 상황이지만, 삶에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일들은 우연인가, 신의 개입인가.(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점이다. 인생에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우연이나 요행이라고 여기는 것보다, 신의 특별한 보살핌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이 훨씬 경이롭게 느껴지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증명해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한 가지 덧붙이자. <미스터 노바디>에서 초점화자인 118세의 니모가 사는 세계는 인간의 죽음이 없어졌으므로, 새로 태어나는 인간의 생명 역시 사라졌다. 그 세계엔 생명을 낳기 위한 육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사랑’ 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예외적인 존재인 니모는 유일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는 죽음을 앞두고 과거 사랑을 나눴던 안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외친다.(이 행동은 9살의 니모가 제3의 삶을 선택했던 것과 관련있다.)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는 사랑을 다시 호명한 셈이다. 세계는 그 순간 ‘빅크런치’(‘대붕괴’, 우주 탄생의 대폭발과 반대되는 개념)가 일어나고,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며 118세의 니모 역시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가 된다. 빅크런치가 시간의 흐름이나 우주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라, ‘사랑’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영화의 논리대로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결국 ’신성한 순간’은 이토록 사소한 우리 삶에 깃들어있다는 뜻이니까. 이것을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는 ‘반짝임’이라고 표현한다. 파도가 제 몸을 뒤집을 때 잠깐 스치는 반짝임,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창문 너머로 새어들어온 빛의 반짝임, 갓난아기의 눈동자. 사랑에 빠진 남녀의 눈빛, 그 모든 삶의 반짝임이 우리 삶에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삶이 당신에게 가장 나은 삶인가. 세상이 반짝이는 무수한 찰나에 경탄하는 삶. 나는 그런 삶의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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