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시간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고 믿으며
그것이 시간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고 믿으며
양재천 산책로. 하오의 햇빛을 등지고 나는 서쪽으로, 그러니까 양재천 자전거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은 공기가 서늘한데 행인들의 옷차림은 가볍고 표정은 환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눈만 보고서도 나머지 표정이 어떨지 가늠할 수 있다는 건 상상력 때문일까 공감능력 때문일까 문득 궁금해하면서.
과천으로 오고서 나는 몇 번 양재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먼 곳까지 다녀왔다. 자전거 덕분에 가능했다. 걸을 땐 알지 못했던 서늘한 공기를 가르는 감각을 느낀다거나, 짧은 시간에 비교적 먼 거리까지 가는 기동력을 얻게된 것 전부. 양재천의 발원지인 과천에서 서초 사이의 산책로 구간에는 시퀀스라 할 만한 것이 작은 터널을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 번째 터널을 통과하면 두 번째 구간이 펼쳐지고 이전에 본 것과 또 다른 풍경이 사방으로 뻗어 나있다. 산책로의 이런 전개가 꼭 서사의 진행처럼 느껴져 나는 내내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종종 뒤를 돌아봤는데 그건 너무 빨리 그곳을 지나가버려서인지, 또는 지나온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인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이 기억을 돌아보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오른쪽 다리 허벅지로 희미한 통각이 스칠 때쯤 자전거를 세우고 벤치에 앉았다. 양재천을 향하고 앉았는데, 가느다란 실개천 안에서 청둥오리, 왜가리, 까치가 저마다 몸을 물로 적시고 있었다. 자기 삶의 얼룩을 지우려는 사람의 몸짓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산책로를 따라 선 나무들의 우듬지가 흔들렸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지나온 것을 찬찬히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가혹할 정도로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고 믿으며. (2022.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