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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Aug 28. 2023

당신의 바다

8월의 제주, 그리고 우리

당신의 바다

8월의 제주, 그리고 우리





   8월 제주에서 우리는 바람보다 빛으로 환기되었다. 때로 그 빛이 강렬해 인상이 구겨지기도 했지만, 마음의 표정만은 햇빛만큼 환했다. 둘 다 바쁜 탓에 겨우 짬을 내서 여행하더라도 그때마다 구름이 끼거나 빛이 희미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도 서로 주고받았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애월과 협재를 차례로 지나쳐 한 오름에 도착했다. 오름을 오를수록 빛에 가까워졌다. 땀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지만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오름의 정상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긴 그들에게서 나온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번졌다. 빛과 웃음, 바람이 천천히 우리 몸으로 스몄다.


  3박 4일의 제주도 일정은 생각보다 시간에 쫓겼다. 조바심 탓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제주도에 왔으니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 제주도에서의 이튿날, 서쪽의 저지예술인마을에서 남쪽의 중문해변을 경유해 동쪽의 사려니숲길까지 다녀온 그날 밤 호텔의 온천에 피곤한 몸을 담그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우리가, (룽설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으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시간에 있어 가난했다는 것을.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시간이 궁핍하다는 생각은 내 속에서 나를 자꾸만 재촉했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안 돼. 어떻게 마련한 시간인데.


  제주도에서의 사흘째 되던 날 새벽. 단잠을 누리는 룽설을 깨울까 봐 조심스럽게 호텔방을 나섰다. 주차장을 지나, 도보를 따라 그렇게 조금 더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호텔의 전경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호텔과 나 사이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안에는 연잎과 백색의 작은 꽃봉오리들이 무수했다. 물살이 일렁이는 쪽을 바라보면 청둥오리가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걸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다가가니 물과 맞닿는 둘레길에 흰 깃털들이 여러 군데로 함부로 뽑혀 있었다. 불길한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떤 새도 없었다. 둘레길을 걸으며 나는 공평하게 시선을 나누어주었다. 나아갈 둘레길, 가운데서 고요한 연못에, 왼편에서 침묵하는 본태박물관에. 그리고 우리 부부가 묵고 있는, 아직 룽설이 잠든 호텔에.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연못 한가운데서 물가로 헤엄쳐 오는 오리 한 쌍과 새끼처럼 보이는 작은 오리 여러 마리들을 발견했다. 나와 아주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내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오리는 뭍으로 올라와 침착하게 몸을 털고, 날갯짓으로 제 몸의 물을 떨구어냈다. 꽥꽥 소리를 내며 두 마리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뒤에 제 자녀들을 거느렸으므로 내 행동이 오리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오리에게 길을 내주고 길이 아닌 곳으로 돌아 나왔다. 뒤를 보니 뭍으로 나오지 않은 어린 오리들을 괘념치 않는 듯 어른 오리들은 여전히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문득 이 광경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관광과 여행을 이렇게 구분했다. 관광이라는 단어는 본래 주역에서 나온 '관국지광'(觀國之光)의 줄임말인데, 그 나라의 빛을 본다는 의미라고. '나라의 빛'이라는 건 결국 그 나라의 본질, 혹은 근본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오늘날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관광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건성'에 있다는 것. 그에게 '사건성'이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내 삶에 단절선을 긋는 것이고, 그 사건을 경험한 나는 이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줄여 말하자면 바뀌고 싶다는 것.


  그 말의 맥락을 제거하고 요지와 의도만 가져온 탓에, 관광과 여행의 구분이 명료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나 내식대로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이 내가 '보는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여행은 '내가' 보는 대상에 관한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관광이 보는 것에 초점을 기울인다면 여행은 보는 나에 주목하는 것. 앞의 것은 관찰이지만 뒤의 것은 해석과 비평이다. 나는 내가 본 것과 나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시간의 여백 위에 이미 적힌 나의 삶(의 의미)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낼 것인가. 요컨대 나는 무엇을 고쳐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제주도에서 나 자신을 향해 물음을 충분히 물었었나.


  하지만 또 생각했다. 제주도에서의 시간이 여행이 아니라 관광에 가깝다 해도, 그걸 성찰하는 일은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다고. 나는 내가 본 것을 기록하고 기억했으니. 조바심은 나를 쉽게 두렵게 만들고 빨리 앞을 향해 달려가라고 부추기지만, 그럴수록 거기에 기꺼이 속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때 그 용기는 지혜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 룽설과 나는 통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제주도에 있던 내내 충만했던 햇빛은 다가오는 먹구름에 의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책을 꺼내 읽었다. 책을 읽다 말고 나는 바다와 룽설을 자주 번갈아 바라봤다. 책에 집중했는지 룽설의 얼굴은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때 룽설의 얼굴은 바다의 고요함을 닮았다. 제주도에서 가져온 또 다른 나의 풍경이다.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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