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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Feb 24. 2019

시는 시를 쓰고, 시인은 시로 산다

영화가 시를 다루는 방식,  <일 포스티노>와 <시>, 그리고 <패터슨>

영화 <일 포스티노>와 <시>, 그리고 <패터슨>을 하나로 묶은 건 일차적으로  ‘시’를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영화는 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세 인물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데, 이걸 인물의 성격차이라고 해야 할까. 글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선 공통점부터 짚어보자. ‘시’는 그들에게 단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다가왔고, 다시는 시를 배우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가 그랬고, <시>에서 양미자 씨가 그랬다. (<패터슨>에서 패터슨은 조금 다른 경우처럼 보인다. 시를 배우는 것을 ‘사건’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는 이미 그 사건을 통과한 사람처럼 보인다) 각각의 세명에게 ‘시’는 무슨 의미일까. 시는 어떤 흔적을 짙게 남기는 걸까.


영화 <일 포스티노>


은유로서의 시,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 영화 <일 포스티노>

이야기는 칠레의 대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가 사는 섬 마을로 오면서 시작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취직한 마리오는 그와 곧 친해지면서 은유를 배운다. 사실 마리오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담아내는 연애 시를 쓰고 싶어 은유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의 존재방식은 애초부터 대상이 아니다. 늘 주체적이다. “시가 내게로 찾아왔다”는 절절한 간증을 네루다에게서 얻어낸 것처럼, 이번에는 마리오의 간증을 시는 듣고 싶어 한다. 결국 마리오는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네루다에게 부끄러워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줄 수 없다 했으므로, 우리는 그가 남긴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한다. 마리오는 결코, 시를 배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 칠레 본국으로 돌아간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고마움을 담아 선물을 준비한다. 그건, 이 작은 섬의 아름다움을 녹음한 테이프다. 그가 테이프에 담은 건, 다음과 같다. “1번/바다의 작은 파도, 2번/큰 파도, 3번/절벽의 바람소리, 4번/나뭇가지에 부는 바람소리, 5번/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6번/신부님이 치시는 교회의 종소리, 7번/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8번/파블리토의 심장소리”(마리오처럼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 대목에서부터 눈물이 터졌다) 이쯤 되면, 마리오는 정확하게 은유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은유란 사물(혹은 관념)을 다른 사물(혹은 관념)로 지칭하는 직선이다. 이 직선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은유의 효과는 강렬하다. ‘-처럼’과 ‘-같이’를 되뇌며 내내 조심스러운 직유와는 달리, 은유는 자기 존재의 한계를 곧장 뛰어넘는다. A가 B면, 더 이상 A는 A로만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이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도약하게 만드는 힘. 앙상한 현실의 뼈마디를 풍성한 살로 채워주는 마법. 이것이 은유의 힘이자, 그가 부리는 마술이다. 밤하늘 반짝이는 별의 소리를 듣는 마리오는, 그래서 시를 배우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세상은 더 이상 ‘그냥’ 세상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서로를 지칭하는 은유의 직선으로 빼곡하다. 이처럼 시는 언어와 낱말로 정성껏 가드닝 한 정원이어서, 그 안의 세상은 백화만발로 충만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


비탄로서의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봐야 하는 / 영화 <시>

영화 <시>의 양미자(윤정희) 역시 시를 배운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김용탁 시인이 강사인 시 창작 교실에 그녀는 참석한다. 그리고 시를 배운다. 강사는 말한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이므로,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잘 보라’는 것. 그럴 때,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녀는 강사의 말처럼 사과를 만져보기도 하고, 골똘히 보지만 쉽게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던 중 손자가 성폭행에 가담했고, 피해 여학생은 충격으로 인해 투신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녀는 이전에 배운 대로(아름다움을 발견) 해선 시를 쓸 수 없다. 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시를 쓴다.


그녀를 달라지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시를 배운 순간 그 자체보다, 감추고 싶은 추악한 진실을 마주할 때를 진정한 ‘사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듣기만 해도 절로 몸서리치게 되는 죄를 지은 가해자가, 다름 아닌 ‘내 손자’라는, 그 냉혹한 진실. 그녀는 이제, 그 진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시는 그제서야 스스로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을 통해 다가가려 했을 땐, 그렇게 자신을 숨겼던 그 시가.


영화 <시>



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 영화에서 뒤집힌다. 시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잔인하리만큼 추악하고 냉혹한 진실을 똑똑히 마주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시인은 아름다움만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럽고 추악한 것까지도 핏발 선 두 눈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할 때야만, 비로소 시는 ‘시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영화의 마지막, 양미자가 시를 통해 피해 여학생과 동일시되는 시퀀스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비참함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야만 간신히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처럼. 그래서 시인이란, (아름다움을) “잘 보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추악한 진실을) “마주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로 사는 시 / 영화 <패터슨>

다시는 시를 배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건'을 겪은 앞의 두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에서의 사건의 전후를 구분하는 선은 모호하다. 패터슨은 이미 시를 쓰고 살아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버스 기사다. 매일 아침 6시 반경, 아내의 옆자리에서 눈을 떠 출근하고, 퇴근한 뒤에 반려견 마빈을 산책시키며, 마무리로 바에서 맥주 한잔을 하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일상을 영화는 카메라로 따라가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은 온통 시로 가득하다.


영화 <패터슨>


앞의 두 영화가 '시를 배우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패터슨>은 이제 '시를 쓰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사는 삶 말이다. <패터슨>은 이 질문에 대해 패터슨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한다. (영화는 패터슨이 살아가는 삶 중의 8일을 잘라 보여주는데, 이 형식만으로도 ‘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만지작했다. “주체로서의 삶과 대상으로서의 시”. 마리오와 양미자 모두 그러지 않았나. 둘은 모두 '삶'이 시를 바라본 경우다. 그 삶이 시를 만나자, 삶의 어떤 부분은 깨지고, 어떤 부분은 풍요롭게 된 경우다. 그래서 <시>의 시 창작교실의 강사는 ‘시인이란 잘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건 모두, 주체는 삶이고 시는 대상이라는 함의다.


영화 <패터슨>


하지만, <패터슨>의 시는 다르다. 도리어 시가 삶으로 밀고 들어온다. 주체는 시고, 삶은 대상이다. 목요일, 퇴근길에서 패터슨은 길에서 시를 쓰는 한 여자아이를 만난다. 소녀는 그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준다. “물이 떨어진다 / 밝은 하늘에서 / 물이 떨어진다 / 10대 소녀의 찰랑이는 머리칼처럼 / … ” 집으로 온 패터슨은 아내에게 길에서 만난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하다가, 돌연 벽 벽에 걸린 사진에 시선이 꽂힌다. 벽에는 ‘폭포수’ 사진이 걸려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그는 그 여자아이의 시를 통해서 다시 인식하게 된 셈이다. (영화는 이런 식의 모티프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니까, 시가 삶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될까. 시인이란, 시로 사는 시 그 자체라고. 폭포를 응시하며 앉아있는 패터슨에게 일본인 여행가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전 시로 숨쉽니다.” 시인에게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닐 것이다. 결국, 시는 시인이 아니라, 시가 쓰는 게 아닐까. 단지, 시인의 손을, 그의 삶을 빌릴 뿐이라고. 시는 시를 쓰고, 시인은 시로 산다.






이 글은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9. 2. 25.)

https://www.artlecture.com/article/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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