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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Jan 26. 2018

'조서(調書)'를 읽고 한마디...

                                                                

5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으며, 게다가 이 양반이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여기저기 뒤지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책의 부제에서 보여지는 풍기는 내음으로 책을 읽었으나 읽는 내내 흥미는 난처함으로 난처함을 집중을 이르기 쉽지 않게 만드는 책이 였습니다. 그리고는 책의 보여지는 글과 글 사이의 행간에 좀더 집중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월 초를 함께 했던 책이 바로 르 클레지오의 <조서>였습니다.                                    

                                                            

'調書', 왜 책의 제목이 조서일까?가 책을 읽는 내내, 혹은 읽은 후인 지금까지도 계속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조서의 사전적인 의미를 다시금 알아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 調書 : 조사한 사실을 적은 문서, 소송 절차의 경과 및 내용을 공증하기 위하여 법원 또는  

            그 밖의 기관이 작성하는 문서


 이 글의 제목이 調書인 것은 바로 사실, 팩트를 기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제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아담이라는 남자에게 듣고 팩트를 옮긴것에 불과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지독하리 만큼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전해들은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팩트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학부때 교양과목을 들었을때의 교수님의 말씀이 문득 떠 올랐습니다. 소설에서의 주인공의 이름의 중요성, 왜 장총찬이어야 했는지, 그리고 왜 크네이트 여야 했는지 말입니다. 調書에서는 다름아닌 바로 아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바로 여자 친구의 이름이 하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으로써의 역할은 필요하지만 하와로써의 역할의 부재를 원하는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에서도 나오듯이 미셸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방식은 어쩐지 사랑이라 보여지지 않음을 알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즉 아담의 일상은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의 하와에 의한 수동적인 삶이 아닌 아담에 의한 능동적인 삶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처럼 자신에 의해서 생성되는 개입을, 일상의 보여지는 모습의 방관 역시 능동적인 개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과적으로 아담은 회귀로의 몸부림속에 있으며, 인위적인 세상에서 오는 소외감을 담담히 받아드리며, 그 자체를 하나의 삶으로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줄거리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도시 산 중턱의 빈집 -> 미셸에게의 편지 -> 해변에서의 일상 -> 인지 될 수 없는 깨달음에 의한 예언자의 모습 ->정신병원'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출발점이 빈집이 아니라 어쩌면 정신병원에서 시작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조서라는 책의 제목이 가능해 지려면 논리적으로 정신병원에서 작성이 비로서 책의 글로써 작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서는 


'전쟁때문이지 혹은 그 밖의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지된 깨달음에 의한 예언자의 모습 ->정신병원 ->도시 산 중턱의 빈집 -> 미셸에게의 편지 -> 해변에서의 일상'


 이렇게 본다면 아담은 진정한 아담으로써의 삶을 살게 된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바로 흰쥐의 살해입니다. 개와 흰쥐에 대한 아담의 반응의 차이의 유발원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어쩌면 개와 아담은 하나의 모습으로의 메타포를 지닌다고 볼수는 있을 듯 합니다. 니즈와 원츠에 부합되지 않는 일상, 혹은 진정한 니즈와 원츠의 부합으로 볼 수있는 일상속에서, 그의 뒤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걸음으로, 반면에 흰쥐는 행동반경이 갖친, 정신병동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본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담은 흰쥐(그리고 보니 흰색은 병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기도 합니다)를 죽임으로써 병원에서의, 안락함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떠들기는 했지만 명쾌함보다는 애매함이 시야를 더욱 가득차게 하는듯 합니다. 읽는 동안 보다 읽은 후에 더욱 생각이 많아 지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https://blog.naver.com/2035ic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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