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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여자 의사 Mar 11. 2021

예약된 질병을 취소하시겠습니까?









 부득이하게 본인의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오지 못 하는 환자들 중에서 이상소견이 있는 경우, 진료시간 틈틈이 전화로 검사결과를 간단히 설명해주며 빠른 시일 내에 내원하도록 권하고 있다.


 20대 초반이었던 그 여자 환자는 체중 감소와 피로를 주소로 내원하여 시행한 혈액 검사 결과, 당화혈색소 수치가 아주 높았다.

 심한 당뇨가 있다는 뜻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까지 심한 당뇨를 진단받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라면 누구나 가족력이나 다른 동반 질환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환자는 아버지가 당뇨가 있었던 것 같다고 조금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다른 질환이 동반되지는 않았는지 질문을 쏟아냈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난감한 침묵이 이어지더니 어렵게 대답이 돌아왔다.






어, 그런데 사실은...
부모님이 제가 어렸을 때 이혼을 하셔서,
아버지와는 왕래가 전혀 없어서요. 잘 모르겠어요.

 

 

 그랬다. 앞서 ‘있었던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에는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후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아버지의 병의 소인이 자신의 몸 안에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느닷없이 전화로 듣게 된 환자의 지금 심정이 어떨까.

 유전이라는 생명의 신비가 그녀에게 원치 않는 족쇄처럼 무겁게만 느껴지진 않을지,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그녀에게 해주지 못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유전적으로 예약된 질병이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떤 예약은 취소와 환불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21세기 초, 과학계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모든 질병이 곧 정복될 것만 같은 꿈에 잔뜩 부풀었었다. 암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난치병들이 정복된 유토피아가 코앞에 있을 것만 같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기대감은 김빠진 콜라처럼 쭈그러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인간의 DNA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복한 후에야 인간이 DNA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마디로 DNA는 변경 불가능의 완전한 설계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DNA는 오히려 대본에 가깝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올리비아 핫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도 있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유전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도 한 명이 조현병에 걸렸을 때 나머지 한 명도 조현병에 걸릴 확률은 50%를 넘지 않는다. 물론 일반 인구의 유병률인 1%에 비하면 훨씬 높은 수치이지만 완벽하게 같은 대본 아래에서도 100%라는 확률이 나오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대체 왜 100%가 아닌가?


 네사 캐리의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에는 오드리 헵번이 네덜란드 대기근 (1944년 11월에 시작되어 1945년 늦봄까지 나치군이 네덜란드의 식량 공급을 봉쇄하면서, 네덜란드 국민은 1일 적정 칼로리 섭취량의 30%에 불과한 식량으로 연명하게 되었고 식량공급이 정상화될 때까지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 죽었다.)의 생존자이며 이 때의 후유증으로 그녀가 평생 부러질 듯 마른 몸과 잦은 건강 문제를 겪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시기에 자궁 속에 있었던 태아들은 영양실조를 겪은 시기가 임신 초기이면 태어날 때에는 정상체중으로 건강해 보였으나 이후 높은 비만율을 보였고 임신 후기이면 정상보다 작은 아기로 태어나 평생 마른 몸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이 중 일부 효과가 이 집단의 자식의 자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무려 3세대에 걸쳐 비만, 당뇨, 심장병 등의 발병률이 증가했다.


 어째서 자신이 갖고 태어난 DNA에 적힌 대로만이 아니라 외부 환경이 영향을 준 시기와 정도에 따라 최종 형질에 변화가 나타나고, 또 그 획득된 변화가 세대를 거쳐서까지 전달되는 걸까?  


 현대 생물학의 새로운 바람 중 하나인 ‘후성유전학’은 이처럼 동일한 대본에서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DNA의 염기 중 하나인 사이토신의 메틸화이다. 말하자면, 대본에서 읽혀야 할 부위에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외에도 히스톤 변형으로 크로마틴의 구조를 변화시키거나, 마이크로 RNA로 유전자의 발현에 간섭하는 방식 등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런 분자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유발하는 거시적 환경은 운동, 영양, 수면, 스트레스, 음주와 흡연이 대표적이다. 특히 음식을 통해 들어오는 엽산은 대사되어 사이토신에 메틸기를 전달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녹차나 강황 등도 DNA 메틸화, 히스톤 변형, 마이크로 RNA를 가역적으로 변화시키는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아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잔소리 시작이구나 싶겠지만, 사실 진료실의 의사도 적절한 운동량과 균형 잡힌 식사에 대한 충고가 얼마나 공허하고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지 잘 안다.

 하지만 의사는 당신을 전혀 모르는 타인 중에서는 가장 당신의 건강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가장 훌륭한 도구인 과학을 통해서 지금껏 애써 연구해 알아낸 결과물이 돌고 돌아 그 뻔한 잔소리라면, 아무리 당신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해도 그걸 피해갈 방법은 없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모든 질병의 유전으로부터 탈출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과도한 희망 고문은 사기에 가깝고, 그러한 접근은 질병의 책임을 지나치게 개인화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다만 나의 의지가 아닌 이기적 유전자의 결과물로서 예약되어 버린 질병을 무대에 올리지 않고 취소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 내 몸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의 신비로운 기적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칼로리를 제한하고, 채소와 과일을 두루 먹으며, 너무 강한 햇빛을 피하고, 꾸준하게 운동하며, 충분한 수면 시간을 유지하는 전통적 건강 지혜의 과학적 근거가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더듬더듬 밝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오래 전 헤어진 아빠가 내 안에 남긴 질병의 유전자는 결코 내 인생 전체를 결정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나의 경험들이 내 유전자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모여 미래의 나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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