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가장 먼저 온 봄

섬세함을 담아 바라보기

by 마음과 정원


늦가을 심어둔 수선화가 올라왔다. 겨울을 보낸 수선화는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끝이 조금 뭉툭하면서도 뾰족한 모양으로, 도톰한 초록 잎이 흙을 밀고 올라온다. 단단해 보이는 그 잎의 모습은 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끝이 서서히 노랗게 물들면서, 얇은 포엽(spathe)이 형성된다. 종이처럼 얇은 그 막 안에서 보호받던 봉오리는 때가 되면 막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허전한 정원에서, 수선화는 그렇게 가장 먼저 존재감을 드러낸다.


저 잎 끝에서 피어나는 수선화의 생장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수선화 핑크참과 팬지


노란 수선화 앞으로 수선화 핑크참이 올라온다. 보라꽃은 무스카리, 그리고 굉장한 번식력을 보여주는 꼬리풀들


노란 수선화가 먼저 올라오고, 곧이어 핑크참이 뒤따른다. 화이트 꽃잎이 단정하게 펼쳐지고, 중앙의 컵 모양은 연어색과 살구색 사이를 오가며 미묘하게 변한다. 이름처럼 선명한 분홍이라기보다, 은은하게 번지는 색이다. 오히려 그 점이 더 오래 시선을 붙잡는다.


막 겨울을 지나서일까, 색이 주는 기운 때문일까. 정원에 서서 수선화를 바라보는 시간은 하루의 결을 조금 다르게 만든다. 시선을 붙잡아 한참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수선화 앞에서 잠시 멈추는 그 감각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과 닮아 있다. 잠깐 나를 들여다보는 것. 오늘 내가 어떤 상태인지,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바쁜 일상 속에서는 그 짧은 멈춤조차 쉽지 않을 때 꽃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나를 정돈해 본다.

수선화가 가장 먼저 피어나 존재감을 드러내듯,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자리를 먼저 내어주는 것. 그것이 건강한 자기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토분에 심은 수선화도 집안 어디서나 잘 자란다.


자기애와 관련된 수선화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사냥꾼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거절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그를 물가로 이끌었고,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비극은 자신을 바라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대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 자기를 들여다보되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피할 때 사람은 더 쉽게 흔들린다. 중요한 것은, 집착이 아닌 인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자기를 바라는 방식을 생각해 보게 는 이야기다.


화사한 핑크참의 모습


수선화만큼 많은 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꽃도 드물다. 장미와 백합 다음으로 많은 시가 쓰인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William Shakespeare는 『겨울 이야기』에서 수선화를 “제비가 오기도 전에 먼저 오는 꽃”이라 묘사했다. 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서는 존재로서의 수선화가 그려진다. William Wordsworth의 수선화 시 역시 잘 알려져 있지만, 같은 풍경을 기록한 그의 동생 Dorothy Wordsworth의 글도 감각적이다.

나는 그들 주변의 이끼 낀 돌들 사이에서 자라는 그토록 아름다운 수선화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피로를 위한 베개처럼 이 돌들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나머지는 몸을 던지고 비틀고 춤을 추며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진정으로 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로시 워즈워스, 그래스미어 저널 (1802.4.15)


도로시는 수선화를 움직임과 상태를 따라가며 기록했다. 돌에 기대어 쉬는 꽃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꽃을 구분해 내는 시선에서 섬세함이 느껴진다.

정원에서 수선화를 바라볼 때, 나도 그 섬세함을 따라가 보려 노력해 본다. 그저 예쁘다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서 있는지를 가만히 읽어보게 되는 순간을 느껴본다.



동네 카페사장님에게 받아온 남쪽 지방의 수선화


땅속에서 준비하는 시간 수선화는 대표적인 추식 구근식물이다. 가을에 심어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운다. 구근은 양파처럼 겹겹이 쌓인 비늘줄기 형태로, 땅속에서 양분을 저장하며 긴 시간을 견뎌낸다. 그리고 봄이 오면 스스로 올라온다. 옆으로 새끼 구근을 만들며 조금씩 영역을 넓혀간다. 매해 새로 심어야 하는 튤립과 달리, 수선화는 한 번 자리 잡으면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을 보여준다.

충분한 햇빛, 특히 아침 햇빛이 중요하다. 꽃이 진 뒤에는 씨앗으로 에너지가 가지 않도록 꽃대를 잘라주는 것이 좋지만, 잎은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 이 잎이 구근을 살찌우고, 다음 해의 꽃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미 다음 계절이 준비되고 있는 셈이다.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계절이었다면, 수선화는 이렇게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시간 속에서, 수선화는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처음 마주하는 봄꽃 수선화에 마음이 간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때를 놓치지 않는 꽃. 조용히 먼저 피어나,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수선화.


이 봄에는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오래 선화도 나도 바라보고 싶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