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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06. 2024

70대의 나는 유쾌한 할머니이고 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작년 이맘때쯤 하루 4줄 짧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5년 다이어리를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에 대한 거국적인 의미를 생각하거나 지나간 20대의 페이지를 추억할 새 없이 30대에 진입했다. 한창 일에 몰입하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선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됐다고???’ 라며 화들짝 놀랐다. 매년 초등에서 중등으로 입학하거나 꼬맹이였던 아이들이 키가 훌쩍 큰 모습을 보며 ‘세월이 참 빠르네.’ 싶었지만 나 또한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는 과정은 급행열차를 탄 기분이었다면 40대로 가는 과정은 잘 준비하고 싶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훈육과 티칭 사이에서 ‘나는 좋은 선생인가?’를 되물었고 좋은 선생이기 위해선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 먼저였다. 사회에서 어른으로 불리는 것이 명백하게 나이를 먹었지만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기다리고, 친구들과 주말이면 뭘 하며 놀지 궁리하느라 바쁜 내가 어른이 맞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기에 40대 멋진 어른의 모습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은 30대를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의 짧은 일기를 쓰면서도 내 안에 ‘네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 거야? 넌 어떤 모습의 40대를 그리고 있는 거니?’라는 질문은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한 날은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라 멀게 느껴진다 생각했고 답을 얻는 루트를 변경해 보았다. 생존하는 인물 중 내게 멋지게 느껴지는 어른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 배우 ‘윤여정’이었다.   




1. 정성을 다하는 태도


Q. 학창 시절 ‘공부는 못해도 숙제는 해 갔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A. 나는 누가 미션을 내주면 잘하든 못하든 꼭 해서는 갔어요.
Q. 애초에 <윤식당>은 슬로 라이프 콘셉트로, 한적한 바닷가에서 손님 없으면 서핑도 가는 <카모메 식당>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주 멀리 와버렸어요.

A. 그게 너무 열심히 한 내 책임이 크죠.
Q. 왜 그렇게 열심히 하셨어요?

A. 못하는 거 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손님이 오니까, 나도 주워들은 건 있어서 잘은 못해도 음식은 뜨끈뜨끈할 때 내가면 웬만큼 맛있다는 건 알거든.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중에서


20대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이면 지금과는 다른 드라마틱한 모습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좀 더 들어 보니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건 정성을 다하는 태도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실은 정성의 다른 말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재능으로 무장한 듯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도 부던한 성실이 단단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 역시 성적의 결과보다 성실한 아이들을 예뻐라 했다. 태도가 몸에 밴 아이들은 결국 자기만의 속도로, 제 갈길을 찾아가더라. 무의미한 숫자를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에 깃든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2.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자연스러운 사람


Q. 김기영 감독이 그 시절에 “내 말을 알아듣는 이가 미스 윤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로 영리한 여배우로 인정받으셨잖아요.

A. 맞아요.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독들의 선택을 받았어요. 미모도 재능도 없었지만 감독들이 디렉팅을 해주면 그걸 최선을 다해 따라갔어요. ‘도구로서 모든 걸 다 하리라’ 하는 그런 자세가 있었지요. 나는 창의적인 배우도 못 되고, 오히려 노예근성 같은 게 있었나 봐.
Q. “최고의 연기는 돈 필요할 때 나온다”는 명언이 그때 나왔지요?

A. 하하하. 그랬어요. 난 실용주의자였어. 마침 집수리를 해야 했거든.
Q. 일흔이 넘었는데도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며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A. 글쎄, 내가 젊은이들을 좋아해요. (생략) 난 내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알아. 그래도 노력은 해요. 애들처럼 똑같이 욕심 안 내고, 밥값은 내가 내고.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중에서

멋지게 나이 들어가시는 어른들의 모습은 모두 자연스러웠다. 무리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고, 무리하게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하지 않기에 작위적이지 않다. ‘자연스럽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내면의 동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닮고 싶은 어른들은 나를 바로 알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편안함을 갖췄다.  


3. 웃음을 잃지 않은 유쾌한 사람


Q. 일하는 사람들과 재밌게 지내려고 많이 노력하시죠?

A. 맞아요. 살아 보니 인생이 별게 아니야. 재밌게 사는 게 제일이야. (생략) 다들 좀 웃으면서 서로 재밌게들 얘기하면 좋겠어. 나는 너무 무게 잡고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부담스러워서 싫더라고.


얼마 전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찾아간 한의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뭐 하는 게 즐거워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다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사는 거 그거, 재밌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한동안 모든 것에 무기력하고 시큰둥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으로 즐거웠던 일을 떠올려봤다. 아무 생각 없이 소리 내서 웃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즐거워하던 취미도 흥미를 잃어가며 이대로 노잼 인생이 되는 건가 암울했던 차 선생님의 조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없는 농담도 하고 자주 웃으며 행복으로 순간을 채우면 하루도 행복해지는 거지 뭐!


Q. 처음으로 72세를 사는 기분은 어떠신가요? (2018년 인터뷰)

A. 매년 달라요. 우아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점잖게 살고 싶지. 하지만 나도 하루하루가 처음이라 실수하고 성질도 내죠.


40대의 나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불안하고 후회하며 반성할 것을 안다. 하지만 20대 과거의 나보다 조금 더 적은 진폭으로 흔들리고, 덜 자책할 것이다. 그렇게 50대, 60대를 거쳐 멀리 있을 70대의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은 쿨하게 넘기고 슬픔이 있는 곳엔 위로와 온기를 나누고 싶다. 부디 의연하고 단단한 마음을 지닌 유쾌한 할머니의 모습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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