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방엔 커다란 창이 있었다.
창 하나만 열어도 뒷산이 쏟아질 듯 방안으로 자연이 통째로 들어왔다.
팔만 뻗으면 산이 그대로 만져지는 곳. 먼발치가 아닌 바로 눈앞에서 자연을 느끼고 호흡하며 그렇게 스무 해를 넘게 살았다.
창을 열면 코 앞에 뾰족한 소나무 잎들이 살랑살랑 진한 향을 내뿜었고, 어쩌다 장난스럽게 솔방울을 창문 넘어 또르르 던져 주기도 한다.
소나무의 이런 다정함과 달리 내 기분이 울적한 날엔 끈적한 나무 진액에다 온갖 것을 던져 화풀이를 했었다.
계절을 흠씬 느끼고 싶을 땐 음악을 틀어 놓고 바래져 가는 잎들을 동무삼아 함께 계절을 나기도 했다.
바람이 거세거나 비가 휘몰아칠 때는 암벽에서 투두둑 떨어지는 바위 조각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다람쥐는 무사한지 괜히 창문을 열어 살피기도 했다.
가끔은 두둑하게 쌓인 나뭇잎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현관으로 슬금슬금 기어 오는 뱀이란 녀석을 마주치는데, 그럴 때면 산 옆에 집을 앉힌 아버지를 최고로 원망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마다 창을 활짝 열어 사계절을 감사히 선물 받고 자란 나는, 서른이 가까워져서야 아파트란 곳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남향이라 햇살도 좋고, 포근한 곳이었지만, 문을 열면 옹기종기 집들만 즐비하게 들어선 풍경뿐.
아침마다 무척 낯설었다.
산은 저 멀리, 손으로 만져지기는커녕 눈으로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방에서 듣던 새소리는 당연하다고 여긴 건 착각이란 걸 알게 된 도시 생활.
들려오는 것은 버스 브레이크 밟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날쌘 오토바이들의 배기통 소리.
자연의 소리는 애써 찾아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억지로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나무와 꽃, 풀이라니.
뒤늦게 깨달았다.
스무 해 넘는 시간 동안 누렸던 자연 덕분에 따뜻한 감성, 차분한 눈길, 넉넉한 베풂을 원껏 누리고 배웠단 걸 말이다.
덕분에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도 되었단 걸 늦게서야 알아차린다.
힘들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힘, 단단히 뿌리내리는 법을 흔들림 없는 나무가 내게 알려 준 가르침이다.
그리고 어른으로써 지켜야 할 것과 나아가야 할 방향도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잃고 나서야 안다고 한다.
진리 같은 말이지만 일상에서는 늘 잊고 살다가 뒤늦은 후회를 반복한다.
창 밖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든든하게 나를 지켜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부모님의 모습, 요즘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날이 허리가 굽고 노쇠해져 가는 부모님, 이제는 내가 부모님의 창 밖 든든한 나무가 되어 드릴 차례다.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도 푸른 소나무가 되어 다정한 그늘이 될 준비를 해야겠다.
창문만 열면 곁에 있어주던 그 시절의 나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