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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Jun 28. 2020

유한함과 유일함

「나는 작다」, 그리고 「나는 소중하다」


꿀꺽 삼켜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두 개의 문장이 있다. [나는 작다. ]와 [나는 소중하다.] 


어떤 식당에서는 이 문장을 [나는 작지만, 소중하다.] 라는 형태로 서빙해오기도 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건 그런 문장이 아니다. 나는 나의 작음과 나의 소중함을 동등한 레벨에서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노력하는 것에서 보람을 찾으며 지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야말로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장'이야말로 내가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일이다. 물론, 그 때의 '성장'이 사회적으로 흔히 말하는 승진, 성공 이런 건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미래의 내가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곧 성장이라 생각했다. 나보다 주변을 살피느라 아무리 과한 요구를 들어도 '네, 괜찮습니다.'라고만 말하던 내가 '아뇨. 그건 싫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멋진 성장. 언뜻 보면 참 긍정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나는 저 생각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지금의 나는 불합격이야. 이런 점을 고쳐야 해. 그래야 비로소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소중하지 않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된 생각이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고쳐써본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개조하려 노력할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내가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존재만으로 소중하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받아 들이고 싶다. 나의 소중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소중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는 소중하다.] 라는 문장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하찮음'과 싸워야 했다. '나는 이렇게 하찮은 사람인데..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일까?'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줄곧 이런 문장을 되뇌였다. '나는 작지만, 소중하다.' 한동안은 이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나는'으로 시작해서 '소중하다'로 끝나는 문장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으니까. 그치만 이제는 저 문장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지만 소중하다는 말은, 어떤 통념을 전제로 만들어진 말이다. 작은 것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는 통념. 소중한 것은 전부 큼직하다는 통념.. '작지만 소중하다'는 말은 그 통념에 도전하는 용감하고 패기 넘치는 말이지만, 여전히 그 통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안티테제가 갖는 한계. 


[나는 작지만, 소중하다.]라는 문장은 작은 접이식 우산이다. 어느 가방에나 들어가는 작은 사이즈 덕에 나는 그 문장을 늘 휴대하고 다녔고, 그 덕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더 크고 튼튼한 차양막을 만들고 싶다. 이 쪽과 저 쪽 각각에 서로 독립된 단단한 기둥 두 개를 세워두고 싶다. 

[ 나는 작다. ], 그리고 [ 나는 소중하다. ]




[나는 작다.]라는 문장에는 나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도 과한 책임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문장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간다. 모든 걸 잘 할 수 없고,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실패를 겪기도 한다. 살다 보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불운과 불행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때도 있다. [나는 크다.] [나는 크고 싶다.] [나는 크면 좋겠다.] 라는 문장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수와 실패, 불운과 불행에 취약하다. 그들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자기 자신을 자기로부터 도려내며, 불운과 불행이 반복되는 자기 인생을 비관한다. 심지어는 이런 게 자기 인생일 리 없다 생각하며, 진짜 자기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반면에 [나는 작다.]라는 문장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수와 실패, 불운과 불행으로부터 보다 쉽게 회복된다. 그런 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맑은 날이 있다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도 있는 것처럼. 날씨가 하루 궂었다고 절망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실수와 실패, 불운과 불행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소중하다.] 라는 문장에는 나의 유일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인생을 딱 한 번 살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말고 우리에게 다른 기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부족한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나는 소중하다.] 라는 문장은 독립적으로 쓰여야 하는 문장이다. 다른 조건절과 함께 쓰여서는 안 된다. 그건 마치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두는 것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뜻이 되어 버리기도 하니까. 




[나는 작다.]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자신의 유한함밖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위축되기 쉽다. 반면에 [나는 소중하다.]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자신의 유일함에만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팽창하기 쉽다. 나는 보통 이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지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내가 가장 열등한 존재로 느껴져서 숨 쉬는 것조차 부끄러울 때가 있는 반면, 오직 나만이 소중한 존재로 느껴져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어떤 문장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마음 속에 문장을 위한 자리가 몇 개 있느냐'의 문제로 느껴지기도 한다. 


갖고 싶은 문장은 둘인데 의자가 하나밖에 없으니 자리 뺏기를 하는 것처럼 유한함과 유일함이 번갈아가며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게 내가 정말 갖고 싶은 문장인지, 이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누구를 앉힐지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마음 속에 의자를 하나 더 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딱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던 유한함과 유일함은 더 이상 싸우지 않겠지. 그들은 자기 몫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커다란 석양을 바라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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