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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Jul 08. 2020

나는 가끔 실패해.

하지만 내가 곧 실패인 건 아냐.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부터였을까. 출퇴근길에 고흐 전시회 포스터가 눈에 자주 밟히기 시작했다. 근사한 포스터를 볼 때마다 나는 '오, 이번 주말에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이런 류의 가벼운 생각은 금세 휘발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민들레 홀씨 같이 나풀대는 생각이 진짜 행동으로 여무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그건, 자연의 섭리와도 맞닿아 있다. 한 마리의 게가 낳은 1만 5천개의 알 중에서 극히 일부만 어엿한 게로 성장하는 것처럼, 내가 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극히 일부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그걸 '자연의 섭리와 맞닿아 있다'라 말할 정도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예전에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나의 생각들이 부끄러웠다. 어엿한 게로 성장하지 못한 알의 개수만큼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왜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 걸까? 너무 게을러서 그런가? 그러면 아직 못한 게 많으면서도 왜 또 늘 새로운 욕망을 갖는 걸까? 나에게 무언가를 원할 자격이 있나? ... 나를 표적으로 하는 질문은 끝없이 샘솟았다.

그 때의 내 마음 속에는 '가고 싶다 생각해봐야 넌 어차피 안 갈 거잖아!' '그렇게 생각해봐야 한때뿐이겠지. 늘 그런 식이니까!'라며 나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나를 겨누는 매서운 질문은 대부분 그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의 변덕과 극성이 최고조에 이르면 나는 전전긍긍하며 눈치 보느라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도 마음 편히 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는 항상 주변을 불안하게 두리번대며 '나의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곤 했다. 내가 실수를 하거나, 성급한 결론을 내리거나,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 아이는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과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작은 실패들을 경험할 때마다 아이는 '역시 나는 실패자야.'라는 문장을 강화시켜 나갔다. 아, 불쌍한 그 아이는 저 문장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저 문장이 더 강해지기 전에, 예상할 수 있는 실패를 어떻게든 막고 싶어 했고, 실패자인 나를 어떻게든 고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아이도 이제 조금은 변했다. 아이는 '역시 나는 실패자야.'라는 문장에서 등을 돌렸다. 대신에  '나는 오늘 OOO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 라는 형식의 문장과 친해지기로 했다. 그건 몹시 큰 변화였다. 그 아이가 마음을 고쳐 먹은 덕에 나는 '존재 자체가 실수이고 실패인 사람'에서 '가끔은 실수도 저지르고 실패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까. 나의 미숙한 부분을 보완하고, 나의 굽은 부분을 똑바로 펴고 싶어 안달이었던 그 아이는 그 동안 꽉 쥐고 있던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아이의 호들갑이 빠져나간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나의 눈으로 내가 저지른 실수와 실패를 응시한다. 그리고 나의 속도와 나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물론 그 여백이 모든 걸 바로잡아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무해한 여백 속에서는 '나의 작은 실패'가 '역시나 실패자인 나'로 부당하게 몸집을 불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의 변화 덕에, 나는 과거의 그 이상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는 금세 휘발될 게 분명한 나의 가벼운 욕망과 생각과 다짐을 긍정한다. 부화되지 못한 수천개의 알은 다른 물고기의 영양분이 되어줄 테다.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던 민들레 홀씨가 어느 날 시인의 손가락에 내려 앉아 생각의 영양분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꼭 여물어야 의미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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