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하지 않는 노력의 경험'과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
세상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천 피스 퍼즐을 맞춰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어쩌다 보니 한 번은 맞췄지만 두 번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혹은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천 피스 퍼즐을 맞추며 느꼈던 '어떤 즐거움'만은 또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퍼즐 맞추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 온전하지 않은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멋진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엔 해내고야 말았다는 성취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 퍼즐을 맞추며 느끼는 주요한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학하지 않는 노력의 경험'과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다.
누가 봐도 확실한 조각, 그러니까 한쪽 면이 평평한 테두리나 확연하게 구별되는 그림을 제 안에 가두고 있는 조각들의 경우에는 단번에 맞춰지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이다. 퍼즐 조각을 앞에 두고 골몰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퍼즐조각을 한 번 대 보았다가 '엥 여기 아니네'하며 멋쩍게 손을 거두는 경험으로 채워진다. '엥 여기 아니네'는 실패의 경험이지만 나는 그 실패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런 작은 실패는 천피스 퍼즐 맞추기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런 작은 실패 없이는 천피스 퍼즐을 완성할 수 없으니까. 작은 실패에, 심지어는 경험하지도 않은 실패의 가능성에 언제나 전전긍긍하는 나로서는, 이 의연함이 좋다. 수없이 작은 실패를 반복하지만 그 어떤 실패 앞에서도 나는 자학하지 않는다.
실패를 거듭하며 결국 한 조각을 맞춰내고야 말았을 때, 나는 기쁘다. 매번 기쁘고, 변함없이 기쁘다. 그 기쁨 속에서 나는 나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습관적 나쁜 생각, 그러니까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자학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퍼즐을 맞추는 동안은 그렇다. 나는 쉽고 작은 성취에 기뻐하고, 그 기쁨은 퍼즐 맞추기를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준다.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믿음이 하나 싹튼다. 서두를 것 없이 이렇게 조금씩 하다보면 결국엔 완성될 거라는 믿음. 어렵게 싹튼 믿음은 이어지는 작은 성취에 힘입어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결국엔 확신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 확신은 좀처럼 작은 성취를 거둘 수 없는 힘든 국면, 그러니까 존 레논의 흰 양복과 횡단보도를 구별해야 하는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나는 확신의 폭신한 손바닥 위에서 끊임없이 시도하고 끊임없이 실패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학을 실패에만 따라붙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학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실패 뿐만 아니라 성공에도 따라붙는다. '내가 그렇지, 뭐.'라며 안 좋은 결과를 예견했다는 듯한 태도가 실패 후 자학이라면, 성공 후 자학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라며 애써 이룬 성취를 깎아내리는 듯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퍼즐 맞추기는 실패와 자학 사이의 고리뿐만 아니라 성공과 자학 사이의 고리도 끊어준다. 끊어진 고리 사이로 그간 자학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노력'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패와 성공을 가늠할 수 있다는 건 어쨌든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기울인 노력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 노력에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 자신에게 그러지 못할, 혹은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다.
상하좌우가 전부 다른 퍼즐로 채워져 있을 때는 의외로 맞추기 쉽다. 근거로 삼을 기준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쪽만 채워져 있을 때는 쉽지 않다. 정답인 줄 알았던 것이 나중에 오답으로 판명되기도 하고, 오답인 줄 알고 제껴두었던 것이 사실 정답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퍼즐 맞추기에서 정답과 오답은 어떻게 판별하는가. 첫째는 그림이고 둘째는 모양이다. 퍼즐 위에 그려진 그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고 퍼즐의 이음새가 헐렁하거나 뻑뻑한 것 없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횡단보도의 하얀색과 가로수의 녹색을 구분하는 건 그림 덕이다. 존 레논의 흰 양복과 횡단보도의 하얀색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오래 들여다보면 구분할 수 있다. 존 레논의 양복은 구김이 들어가있는 하얀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횡단보도. 모두 똑같은 하얀색이기 때문에 이 때에는 모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양에 의지해서 맞추다 보면 약간 헐렁하거나 뻑뻑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손맛이 영 다른데도 '그냥 기분 탓이겠지' 하며 넘어가는 것이다. 어떻게든 맞추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면 그렇게 된다. 이음새가 뻑뻑한 퍼즐을 억지로 끼워넣은 다음 괜히 그 곳을 꾹꾹 눌러보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뻑뻑한 이음새가 조금은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치만 이 정도쯤이야, 라는 마음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는 한 천 피스 퍼즐은 영원히 맞출 수 없다. 퍼즐은 연쇄다. 하나가 어긋나면 다른 것도 어긋난다. 그냥 조금 뻑뻑한 정도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조각을 우겨 넣다가는 마지막 남은 조각의 모양과 마지막 남은 공간의 모양이 다른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불길한 예언조로 써두긴 했지만 사실 '하나라도 틀리면 어쩌지..' 하고 겁 먹는 건 퍼즐 맞추기에 도움이 안 된다. 이 때 도움이 되는 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잊지 않는 것이다. 헐렁함이나 뻑뻑함 없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제 자리를 찾아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한다면, 맞지도 않는 곳에 엉뚱한 퍼즐 조각을 맞춰넣으려는 억지시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퍼즐 조각에게는 제 자리가 주어져 있다. 제 자리가 아닌 곳에 무리해서 있을 필요는 없다. 옆 퍼즐의 뾰족한 모서리가 나를 괴롭힌다면 크게 소리 쳐야 한다. '여기는 제 자리가 아니에요!' 그것도 못 견디겠으면 그냥 뛰쳐 나와야 한다. 아픈 걸 참고 있으면 병이 된다. 천 피스 퍼즐은 모든 조각이 자기 자리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때에만 완성된다. 한 조각이라도 병들어 있다면 천 피스 퍼즐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퍼즐 조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아파하는 조각이 하나라도 있는 한, 마지막 퍼즐은 절대로 맞춰지지 않는다. 퍼즐을 맞추는 동안 나는 이 극단적으로 평화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모두가 만족하는 상황 같은 거, 이 세상에는 없을 지 몰라도 퍼즐의 세계에는 존재한다. 아니,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빨려 들어가듯 쏙쏙 제자리에 눕는 퍼즐을 보며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음미한다. 이 기쁨을 나는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