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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Feb 12. 2021

땅콩 버터 죽음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왜 죽는가? 라는 질문에 인과론으로 대답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은 죽기 마련이니까'라는 식의 인과론적 대답을 하고, 목적론으로 대답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하여'라는 식의 목적론적 대답을 한다. 죽음을 대하는 과학의 태도가 인과론적이라면, 종교의 태도는 목적론적이라 볼 수 있다. '숙명'과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는 이 각각의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숙명' 이라는 키워드로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삶을 억누르는 저주다. 내가 뭘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엔 죽음이 나를 꿀꺽 삼킬 테니까. 그래서 이들에게 죽음은 고통이다. 이들은 망각 혹은 은폐를 통해 죽음에 저항한다. 죽기 직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삶이란 고통스러운 올가미일 뿐이다. 이들에게 삶은 너무 가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은 바로 이 '해방'으로서의 죽음에 자기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죽음을 숙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아예 눈을 돌린 채 살아간다면, 이들은 죽음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 오늘도 살아야 하네.'하고 한숨을 쉬며 죽은 것과 다름 없는 마음으로 간신히 살아간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죽음을 삶에서 몰아냄으로써 삶을 일그러뜨리는 문제가 있다. 정재현 교수는 이 두 가지 관점을 융합함으로써 삶 속에 죽음을 융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을 끌어안을 것인가. 당신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숙명'인지 '해방'인지에 따라 죽음을 끌어안는 방법이 달라진다.


당신이 죽음을 '숙명'이라 생각한다면, 그래서 삶의 끝에 죽음을 밀어두고 그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식빵 위에 두터운 땅콩버터를 골고루 펴바르듯 죽음의 숙명을 인생의 모든 순간에 펴발라보라. 삶의 매 순간 버티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응시하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그렇게나 지워내려 했던 '죽음'은 '유한함'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것이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에게 죽음이 저주로 느껴지는 건, 죽고 나면 어떤 길도 걸을 수 없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의 손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을 땅콩 버터처럼 얇게 펴바르면 '유한함'에 대해 새롭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애초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모든 길을 걸을 수 없고,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의 손도 잡을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자연스레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걷는 일,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음식, 지금 내가 잡고 있는 이 사람의 손. 죽음은 이렇게 삶의 동력이 된다.


당신이 죽음을 '해방'이라 생각한다면, 그래서 삶의 끝에 서 있는 죽음만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사람이라면, 식빵 위에 두터운 땅콩버터를 골고루 펴바르듯 죽음의 해방을 인생의 모든 순간에 펴발라보라. 삶의 매 순간 버티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응시하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삶의 끔찍한 올가미들, 그러니까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려 하는 당신의 모습이나 스스로를 망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타인과의 약속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공연한 착한 체 하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이로 인한 죄의식도 털어냄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 이 사실을 깨달으면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죽음'의 다른 이름이 '초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을 끌어안음으로써 당신 인생에 '초월'을 녹여낼 수 있다면, 당신이 무겁게 들고 있던 그 모든 짐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이렇게 삶의 동력이 된다.


식빵 위에 얇게 펴바른 '유한한 초월' 위에서 우리는 달콤하고 고소한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후회와의 안녕)이며, 미래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불안과의 안녕)이다. 과거에 살고 있는 기억 속의 '나' 혹은 미래에 살고 있는 기대 속의 '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거면 된다고, 그렇게 달콤하고 고소한 현재를 베어물며 살아가라고, 땅콩 버터 죽음이 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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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ed by. 

https://www.youtube.com/watch?v=AC5OcAwgf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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