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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Mar 12.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에 대하여

요즘에는 쓰지 않아도 숨쉴 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지 대강 6개월은 된 것 같다. 


친구가 준 소원 스티커에 '나를 사랑하기'라고 멋쩍게 써넣었던 적이 있다. 그건 내가 서른을 눈 앞에 두고 있던 때의 일이다.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혹은 슬프게도, '나를 사랑하기'라는 소원에는 역사가 싶다. 스물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열아홉의 내가 품고 있던 소원 역시 '나를 사랑하기'였으니까. 10년 묵은 소원을 멋쩍게 써넣으며 이건 내 평생의 숙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는 나를 사랑한다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사랑할 수가 없어서, 나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빌어서라도 나 자신을 사랑해보려는 이 노력이 안쓰럽지도 않냐면서.. 마음 속으로 괜히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소원이 지금은 이뤄진 것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먼 길을 돌아 왔지만, 이제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의 사랑이란, 내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그런 사랑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체념과 수용에 가깝다. 나에게 주어진 게 오직 '나' 밖에 없는데 뭐 어쩌겠어. 나에게 허락된 게 나로 사는 인생뿐인데 뭐 어쩌겠어.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많지만 별 수 있나? 그냥 끌어안고 살아야지 ...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이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중얼대며 내 품을 기꺼이 열어주는 마음에 가깝다. 


나는 나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없어서, 부족한 점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부분을 내 안에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과 오류 투성이인 내 자신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다. 그걸 깨닫고 난 이후에야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결함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보기에 좋은 걸 좋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두고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가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것,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 


나에게는 사랑받지 못하며 자랐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있었다.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기보다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행해졌다는 생각을 훨씬 많이 하며 자랐다. 지금은 우리집 정도의 가정 불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소심하고 폐쇄적이었던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다.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마음 속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영국 남자 네 명이 달라 붙어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 따뜻하고 포근한 것들은 모두 빨아 들이고야 마는 시커먼 구멍. 


그런데 작년 가을쯤.. 문득 눈이 확 떠졌다. 내가 바라는 모양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나도 충분한 사랑을 받았구나. 매일 엄마가 싸준 도시락도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고, 술 취한 아빠가 하는 고맙다는 인사도 아빠 나름의 사랑이었고, 둘이 그렇게 안 맞으면서도 꾸역 꾸역 내 곁을 지켜준 것도 그들 나름의 사랑이었구나. 나는 내가 바라는 모양의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이 주는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던 거구나. 아주 짧은 깨달음의 순간 동안, 과거에 내가 놓친 모든 사랑이 내 존재를 흠뻑 적셔주었고, 내 갈증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아마도 그 이후의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도. 불완전한 존재가 준 불완전한 형태의 사랑을 통해 나는 불완전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나의 평생을 추동해 온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사라졌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충분하니까. 


내가 나의 불완전함을 받아 들이기 전에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나의 욕망 덕분에, 그나마 지금 이 정도라도 하며 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나에 대해 그냥 만족하게 된다면,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불안함마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다 우스운 얘기다. 그런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봐야 나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텐데. 내가 나를 받아 들이고 나면, 평범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함도 사라진다. 애초에 '평범함'이라는 건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나에게 평범할 수는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시도이며, 내가 가꿀 수 있는 유일한 꽃밭이니까. 사랑은 이렇게 평범한 걸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사랑의 특별함을 경험하고 나면, 나의 평범함을 유난스레 부끄러워 하지도 않게 된다. 


메워진 것처럼 보이던 구멍이 한순간 뻥- 뻥- 뚫리는 걸 봐 왔어서, 이번에도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이번엔 제법 오래 간다. 중간 중간 지진이 지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디폴트값이 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은 순식간이었지만, 이런 글을 쓰던 과거의 나에게 분명히 빚진 것이 있겠지. 듣고 있니? 나는 지금 성숙하고 무한하고 따뜻하고 충분하고 친숙한 위로의 세계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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