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 혹은 새해 결심

by 은예진

pil****** > 늙는다는 것

가끔 나이 든 내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 본다. 단단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인데.

다들 어떤 모습을 꿈꿔?


yejin0714

내가 늙어 보니까 젊었을 때랑 별 차이 없음. 그냥 겉만 할머니 ㅋㅋ 그러니까 지금 원하는 대로 살아야 원하는 모습의 할머니가 됨.


흔히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가에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이 귀여운 할머니다. 스레드에서 누군가 올린 글에 내가 답을 달았다. 손녀를 보고 할머니가 되었지만 마음은 젊었을 때나 똑같으니 할머니가 별거 아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격적 결함이 있다. 나의 치명적 결점은 조급증인데 이 조급증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내가 나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게 될 때다. 무의식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다 위기감을 느끼면 검은 괴물처럼 불쑥 올라와 나를 난처하게 만든다.


예시 1

얼마 전 배가 아파서 근무 시간에 잠깐 다녀올 요량으로 병원에 갔다. 월요일은 병원에 환자가 많은 날인데 사람 많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하며 병원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대기실을 꽉 채운 환자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기다리려면 한 시간은 될 것 같은데 퇴근 후에 다시 와야 할까 싶었다.


나보다 한 발짝 먼저 들어간 환자가 접수대로 가자 간호사가 입구 쪽에 있는 키오스크를 가리켰다. 접수는 이제 그쪽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뒤돌아서자 이제 순서가 바뀌었다. 먼저 온 환자가 있지만 뒤에 선 내가 키오스크에 가까웠다. 나는 재빨리 환자 등록을 했다. 한 명이라도 제치면 그만큼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등록을 마친 뒤 대기 환자들 속에 섞여 자리에 앉는 순간 현타가 왔다. 사람이 많고 기다림이 길어질 것 같으면 나는 그걸 못 참고 이렇게 없어 보이는 짓을 한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상 환자 한 명 보는 시간 기껏해야 오분 이내인데 그걸 빨리하겠다고 이러다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드라마 '종이달'에서 졸부가 된 부모 덕분에 고용주 집안의 딸인 이화와 결혼한 최기현은 자격지심 때문에 재벌의 언동을 따라 하느라 엉뚱한 짓을 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이화가 근무하는 은행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재벌과 동선이 겹쳤을 때 재벌은 기꺼이 양보하며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최기현은 매의 눈으로 그 순간을 포착하며 흉내 내고 싶어 했다.


재벌은 기다릴 필요 없는 삶을 사니 느긋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소한 곳에서 경쟁해야 하는 나는 별것도 아닌 순서에 집착한다. 내가 재벌도 아니고 최기현처럼 재벌 흉내를 낼 필요는 없지만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최소한 상식적인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그날 나는 접수대에서 돌아서는 사람을 기다려야 했다.


예시 2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식당에 들어가면 큐알코드를 찍어 인증을 해야 했다. 미리 네이버나 카카오에서 인증서를 받아놓아야 식당에서 큐알 인증이 가능했다. 내가 식당에 들어갔을 때 앞서 들어간 사람이 큐알코드 앞에서 버벅 거렸다. 인증을 하려고 보니 인증서가 만료된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에서 네이버에 들어가 인증서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먼저 큐알을 찍어버렸다. 순간 인증서를 받고 있던 남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먼저 와서 하고 있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신경질을 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버벅 거리다 동행이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봉변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리에 들어가 씩씩거리며 동행과 그 사람을 흉봤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잘못했다. 큐알을 차지하고 서서 인증서를 다운로드하고 있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ATM기 앞에서도 여러 건을 처리하려면 한두 건을 처리 한 뒤 다시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뒤에 사람을 세워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나에게 소리칠 만큼 잘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흉볼만한 처지 또한 아니었다. 그가 시간을 끌고 있으면 내가 물어봤어야 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찍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들었어야 하는 것이다. 조급한 성격 때문에 큐알 코드에 핸드폰부터 내민 것은 확실히 무례했다. 내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 손이 먼저 올라갔다. 그건 의식의 영역이 아니었다.


예시 3

남편과 뷰가 좋기로 소문난 카페엘 갔다. 일 층은 만석이었다. 남편이 주문 줄에 서고 나는 자리를 잡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 또한 만석이었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삼 층에 올라가자 창가에 좋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 앞에 젊은 아가씨가 걷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발 걸을 재촉 해 창가 자리를 행해 달렸다. 나이스, 성공이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순간 아까 내가 앞지른 아가씨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화가 잔뜩 난 아가씨는 자기가 앞서 걷고 있는데 그렇게 뛰어가 자리를 잡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씩씩거렸다. 처음 겪어본 항의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한 나는 얼굴이 달아 올라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후 나는 절대 카페에서 자리를 잡겠다고 하지 않는다. 남편이 자리를 잡고 있으라고 하면 내 트라우마 모르냐며 손을 내젓는다.


후에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창피를 당했다고 하자 해답을 제시했다. 카페 자리 만석을 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움직인 것은 무의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다음 아가씨가 항의해 왔을 때 바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고 했다. 무의식은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해도 항의를 받았을 때는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웃음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정확하게 사과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어야 한다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비록 엉겁결에 뛰었다고 하지만 항의를 받았을 때 사과를 하고 일어섰더라면 항의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웃으며 얼버무리는 바람에 버스에 타면 빈자리를 잡기 위해 가방을 내던진다고 조롱받는 할줌마가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떤 할머니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았다. 인구 밀도 높은 나라에서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제치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순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혹시 그걸 잊어버리고 실수하더라도 기꺼이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게 2026년을 새로 시작하는 나의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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