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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pr 16. 2023

당신의 방

깔끔하게 정리된 당신 방과 달리 엉망진창으로 어질어진 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모습이든 그곳 한편에 내 흔적 하나쯤 있다면 더 좋겠네요. 나는 종종 내가 그린 당신 방에 들려요. 당신 흔적이 없던 일상으로 돌아와도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하죠. 나에게 들려준 당신 이야기들로 가득해요. 그 이야기 속 단어들을 하나둘 들쳐보면 참 여리고 겁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이들에게 상처받고 누구나 하는 실수에 자책하기도 하던 사람이었어요. 당신의 아쉬움과 두려움이 보여요. 가끔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자주 들여다보게 돼요. 당신 방은 따뜻한 햇살로 가득하죠. 늦은 오후 당신과 누워있다 보면 그 햇살이 고마웠어요. 차가운 당신 방을 데워주니까요. 오후엔 비가 그쳐서 다행이에요. 오늘도 혼자 평온한 시간을 보냈겠죠. 문득 당신 생각이 나네요.


당신 이야기를 했어요. 실없이 당신의 장점만을 늘어놓았어요. 당신을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웃고 있었어요. 그냥.. 당신이 한 야한 농담들이 떠오르면 피식 미소 지어요. 왜 좋으면서도 슬픈 걸까요. 나 역시 두려운 것 같아요. 예고 없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요. 아마도 이건 내 트라우마일 거예요. 당신을 떠올리면 내 아픔이 드러나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깊게 담고 있나 봐요.


참 잠들기 힘든 밤이네요. 이 밤만큼은 당신 방에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잠시 들렸어요. 혹시 당신도 종종 내 방에 왔다 갔나요. 다음에 찾아오거든 메모라도 남겨줄래요? 가볍게라도 남겨주면 좋겠네요. 몹시 기쁠 것 같아요. 괴롭히는 소리도 듣지 않고 평온하게 잠들었길 바라요. 잠든 당신 모습을 보고 싶네요. 나도 당신의 눈썹을 어루만져보고 싶네요. 그때 왜 내 눈썹을 어루만졌나요. 눈썹 언저리에 아득하게 남겨져 있어요. 눈썹 사이 스친 온기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되짚어보며 돌아가요. 다시 느끼고 싶은 순간이에요.


내 방 작은 책꽂이엔 당신이 있어요. 당신을 알고 싶어 읽던 심리학, 당신을 그리며 읽던 소설, 내 마음과 같던 시집. 당신에게 물어보면 될 걸, 나는 여전히 돌아갑니다. 나름대로 당신의 보폭에 맞추고 싶었어요. 서로에게 기대 스르륵 잠들었던 우리의 처음이 떠올라요. 아무렇지 않게 보낸 순간인데, 지금에서야 많이 그립네요. 내 품에 기대 잠든 이 작은 고양이처럼 어떤 거리낌 없이 나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며 쉬어가는 시간이 당신의 방에 남겨지길. 고양이 그림과 함께 짧은 일기를 써서 붙여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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