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1880년대 파리의 어느 가을날, 저녁에 한 차례 몰아치던 돌풍이 잠잠해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서재에서 파이프를 피우며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두 남자를 파리 경찰청장이 찾아온다. 두 남자 중 한 사람은 탐정이었는데, 청장은 그에게 “간단하지만 참 이상한” 사건을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한다. 사건은 간단하다. 도둑맞은 편지를 찾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짐짓 간단해 보이는 사건 때문에 청장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편지를 훔친 현장과 범인, 사건의 정황은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편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추리소설의 원형을 제공한 미국 작가 애드가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이다. 왕비에게 누군가 보낸 비밀편지가 악의를 품은 장관의 손에 들어간다. 이 편지 내용이 왕에게 알려지면 왕비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장관은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또 왕비에게 그 편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눈치채고 왕비가 보는 앞에서 바꿔치기 수법으로 편지를 훔쳐간다. 이렇게 버젓이 악의적 행위가 저질러진 상황이니, 청장은 자신만만하게 장관의 집을 수색했다. 하지만 편지는 없었다. 청장의 의뢰를 받은 뒤팽은 오래지 않아 장관의 집에 들어가 힘들이지 않고 바로 편지를 찾아낸다.
정신분석이론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이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라깡의 대표작인 『에크리』의 첫 논문에서 다루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앞서 제시한 간략한 소설 내용만 들어도 우리는 도대체 그 편지가 뭐기에 그렇게 왕비가 안절부절못하고, 또 경찰청장이 애를 먹으면서도 편지를 찾아내려 할까 궁금해진다. 편지는 누가 보냈고 그 내용은 무엇일까. 왕비는 비밀연애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왕에게는 비밀로 부쳐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소설은 편지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알려주지 않는다. 편지의 발신자와 내용, 또 그 중대함의 정도와 이유는 이야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라깡의 개입은 바로 이 부분에 집중되어있다. 이 소설은 편지의 경로, 즉 왕-왕비-장관의 관계 속에 놓인 편지가 장관-경찰청장-왕비로 옮겨갔다가, 다시 장관-뒤팽-경찰청장(혹은 왕비)으로 옮아가는 삼각형 구조의 변천을 통해서 종국에는 원래의 주인인 왕비의 손에 안착하게 되는, 일종의 편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영어에서 편지에 해당하는 낱말 letter가 알파벳 문자도 의미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여기서 편지는 단지 내용을 담은 전달매체일 뿐 아니라 주체들의 관계 속에서 순환/교환되는 문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라깡의 저 유명한 문구인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에게 도착한다”는 명제를 확인시켜준다.
나아가 이 ‘편지’란 유아시절 부모로부터 전송된 ‘문자’ 또는 기표로, 이후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도둑맞게’ 되는 그 문자이기도 하다. 주체의 심리는 이 ‘기표’, 우연히 부모의 대화 속에서 들려온 어떤 언어적 기표 주변으로 구성된 심리적 구조를 갖게 되고, 이 기표는 주체의 비밀을 여는 매스터 키 같은 것이 된다. 다만 기표는 의식적인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주체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채, ‘도둑맞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즉 문자에 관한 이 짧은 이야기는 어떻게 법과 연결될까. 라깡은 이 소설에서 세 가지 시선, 즉 응시를 구조화한다. 이 중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시선의 위치에 왕과 경찰국장이 놓인다. 이 둘은 ‘법질서’에 해당하는 존재로서, 소설이 전개되는 동안 ‘무지’의 상태에 있다. 그들은 진행되는 사건을 전혀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준다. 왕이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른다면, 경찰국장은 알고 있으되 해결할 방법을 모르는, 즉 탐정은 꿰뚫고 있는 장관의 전략에 관해선 감감하다.
이 둘의 무지, 특히 그중에서도 왕의 무지는 바로 여기 우리가 당면한 법의 무지를 가리킨다. 많은 독자들(*)이 왕이 사건에 개입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능하거나 소용이 없는 존재라고 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이야기에서 왕의 존재가 없으면 편지를 둘러싼 그 모든 소동과 두려움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왕은 ‘전능’하다. 왕비가 편지를 받는 장면에서 왕의 현존은 왕비로 하여금 편지의 정체가 발각될까 노심초사하게 하고 장관이 왕비의 약점을 잡게 만든다. 편지의 도착, 즉 기표의 현현은 사건을 일으키지만, 왕이라는 법 그리고 그 무지는 사건의 전개에 필수적이다. 왕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경찰청장의 무지와는 사뭇 다르게 주체의 관계망을 작동시키고 [왕은 계속 아무것도 몰라야 하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을 일으키며 그 와중에 선과 악이 드러나고 해결책이 모색되도록 이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선택,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고정된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이 무지의 근원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포의 이 짧은 소설은 법과 그 무지의 함의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을망정, 그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간명하게, 추리적 재미를 더해서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 속의 왕은 정신분석 이론가 조운 콥젝이 제시한 “법의 완전하고 복합적인 상징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고, 스티븐 밀러의 “하나의 법이 있다는 기적”을 형상화한다.
정신분석은 어떤 가치와 내용을 담고 그것을 명령하는 실정법이나 법규를 다루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하나의 법, 즉 일자로서의 보편적 질서라는, ‘기적 같은’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법은 주체가 선과 악을 가르고 정의를 추구하게 이끄는 토대로서의 초월이다.
사안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발과 고소로 대응하는 것만이 마치 무죄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항의하는 방식이 되어버린 작금의 상황은 법의 물신화를 심화시킨다. 법 조항의 문자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남용하려는 온갖 시도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을 상기시킨다.
법은 법문서의 형태로, 법정에서의 판관이나 대리인의 모습으로, 혹은 티브이에 등장하는 무수한 법조인의 얼굴로 우리 주변을 부유한다. 이런 페티시들 너머 하나의 법이 있어, 우리로 하여금 불의에 맞서고 시민 불복종을 감행하게 한다. 우리는 이 법에 충실함으로써만 사유화되어가는 현실 법의 페티시들에 저항할 수 있다.
주체는 오직 법의 무지 속에서만 법에 충실할 권리와 자유를 얻게 된다.
*자크 데리다 등 이론가들은 이야기 속 왕의 부재 혹은 침묵을 상징적 ‘거세’로 읽는다. 이론 독해는 아무래도 비평가의 무의식이 과도하게 투영된 듯 보인다. 이에 반해 정신분석적 ‘무지’ 개념은 ‘왕’을 한 남성 개체 또는 권력자의 위치를 넘어서 보편적 법의 위치를 점하는 상징적 지위로 볼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글은 필자의 역서에 수록된 역자 서문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