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관찰일지 #10
올해 첫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정말 더운 한 여름이 아니면 찬 음료를 잘 시키지 않는데 오늘은 너무 더웠다. 갑자기 따뜻해진 줄도 모르고 너무 덥게 입고 나왔다.
이제 꽃샘추위가 지나가면 완연한 봄이 오겠지. 날씨가 따뜻해지고 옷차림이 가벼워지면 긴장이 된다. 봄이 오면 우울감이 증폭된다. 보통은 겨울이 긴 북쪽의 나라들에서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울감이 높아지는 계절성 우울증이 많다고 하는데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20대 초반에는 잘 몰랐다. ‘힘든 일이 있어서 좀 괴롭구나, 무기력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기가 항상 봄이었다. 비슷한 감정의 패턴이 비슷한 시기에 반복됐다. 상황에서 원인을 찾았지 내면과 관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3월이 주는 ‘새로움’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던 것도 같다. 감정의 큰 기복 없이 잘 넘어가던 때도 있었다. ‘봄’과 관련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대학원에 들어가서부터였다.
2학년이 되면서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열심히 자기소개서도 쓰고 필기시험도 보러 다닐 때였는데 늘 지쳤다.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일부러 아무도 가지 않을 만한 카페를 찾아갔고 혼자 밥을 먹었다.
평소처럼 카페를 갔다가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조금씩 피기 시작하는 벚나무들이 길가에 가득했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라 학교 후문에서 수많은 학생들 무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나는 후문 방향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는데 학생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눈물이 주체되지 않아서 기숙사까지 10분 정도를 울며 걸어갔다. 마침 기숙사 방에 아무도 없어서 침대에 들어가 한참을 더 울었다.
그때 처음으로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봄마다 반복되는 감정 기복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주체할 수 없는 기분으로 마음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는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청년들을 대상으로 상담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신청했다. 들쭉날쭉 날짜를 바꾸기도 하고 인턴 취직으로 갑작스레 상담을 멈추었다가 다시 재개하기도 하며 애를 많이 썩이는 내담자였다. 10회기를 다 채우지도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늘 같은 마음으로 대해주셨다.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셨던 것 같다.
상담을 다녀오는 날에는 늘 마음이 홀가분하고 마음의 에너지가 차올랐다. 근처 맛집에 들러 초밥 한 팩을 포장해 저녁을 먹었다. 당시에는 사치였지만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덕분에 그 시간을 잘 버티고 취업도 했다.
취업을 하고 매달 들어오는 일정한 금액의 월급이 마음을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지를 처음 깨달았다.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지만 마음 상태는 어느 때보다 좋았다.
이제는 30대 초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꽃샘추위가 다가오면 방어적인 마음이 된다. 취업을 하고부터는 힘들었던 봄의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은데 긴장되는 마음은 아직 남아있다. 올해도 여전하다.
얼마 전 엄마 아빠와 등산을 다녀왔다. 우리가 다니는 코스의 시작점에는 동백숲이 있다. 음지에서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꽤 어둡다.
“저 봐라, 햇볕이 안 드는 것 같아도 사이사이 꽃이 핀 데는 햇볕이 들어온다는 거지. 햇볕이 드는 틈새로 꽃이 핀다.”
엄마가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심오한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멋진 말인 것 같아 폰을 꺼내 메모했다.
20대 이후로 나의 봄은 늘 우울했던 것 같은데 틈새로 꽃이 피는 날들이 있었다. 암막 커튼을 친 것처럼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를 만날까 봐 날씨가 따뜻해지면 두렵다.
그런데 그런 일은 꽤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도 틈새 사이사이로 피어나던 꽃들이 있었다. 만개하면 만개하는 대로, 어설프게 피어나면 어설픈 대로, 얼마 못 피고 똑 떨어지면 또 그런대로. 날씨가 따뜻해지고 햇볕이 들면 외롭지 않은 꽃들이 함께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