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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Sep 26. 2022

절대 솔직할 수 없는 사람

아홉 번째 단짠레터

"넌 왜 다 괜찮다고 해? 솔직히 얘기해 봐. 전혀 괜찮지 않잖아."


몇 년 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스스로가 꽤나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말을 들으니 머리가 띵- 하더군요. 솔직함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감정을 다 드러내는 것? 한 치의 거짓 없이 나를 꺼내 보이는 것? 이상하게 저는 부정적인 감정 앞에서는 솔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제가 받은 상처를 깊이 있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가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본원적인 상처와 슬픔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똘똘 뭉친 응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애써 잊고 지내왔습니다.


저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인생에 회의적이며,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영원불멸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믿기 때문에 무신론자입니다. 유일하게 신뢰하는 것은 제 자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상처와 우울감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이렇게 형성된 제가 꽤 마음에 들지만 어쩔 땐 힘들다고 얘기하지 못하고 스스로 삭이는 제가 한심해 죽어버릴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슬픔에 잠식되었을 때 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합니다. 때때로 스스로가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이상한 방어기제가 작동되기 시작한 건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였습니다. '완전한 울타리는 없구나, 언제든지 소중한 것들은 떠날 수 있구나, 어쩌면 엄마도 내 곁에 없을 수도 있구나, 결국 나는 혼자 남는구나,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구나.' 정을 주는 것이 무서워 남들보다 먼저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마침 엄마도 줄곧 아빠의 부재를 주변에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요. 도피하듯이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을 때 저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항상 제게 주문을 걸었어요. '기죽지 말아라. 당당해라. 없어도 있는 척해라. 남들에게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그 주문 때문일까요. 힘들어도 안 힘든 척, 좋아도 별로인 척, 그렇게 척하는 삶이 저를 무미건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감정을 속이는 일은 흔들림 없이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 주었으니까요. 스스로도 모르게 저는 무던히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데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무딘 사람이 되었죠.


그렇다고 제가 감정 없는 로봇은 아닙니다. 정말 좋아했던 사람에게 제 마음을 모두 꺼내보았던 적도 있었어요. 헤어지기 싫어 애처럼 울기도 하고, 작은 배려에 크게 감동받고, 서운함, 섭섭함, 불안, 행복, 기쁨 등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과 마음을 모두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해지니 저 멀리 떠나가더군요. '아, 이게 솔직함의 대가인가? 적당히 솔직했어야 했을까? 누구는 자꾸 괜찮은 척하지 말라는데, 대체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는 거지?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아픈 기억이 불쑥 찾아오면 회피해버리고, 밀려오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위로받고 싶다가도 마음 깊이 이해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 감내합니다. 괜히 엄마 탓도 해봅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건 창피한 게 아니다, 그 부재는 우리가 함께 채울 수 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너대로 지내면 된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해주었다면 달라졌을까요.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솔직해질 수 없는 병. 고민 많던 심경을 적은 과거의 일기를 공유하며 아홉 번째 단짠레터 마무리하겠습니다.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찾고 싶다. 가슴속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탈탈 털고 잠시나마 빈 공간으로 두고 싶다. 의지하고 싶을 땐 의지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상처를 핑계로 객기를 부리고 싶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약점을 꺼내보이고 싶다. 외로움은 인간의 본연적인 감정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지 않다. 마음껏 사랑하고 표현하고 싶다. 감춰두었던 덩어리를 토해내고 가벼워지고 싶다. 아니면 말끔히 소화시켜 배출해버리던가. 불청객 같은 기억도 충분히 즐기고 잊어버릴 수 있기를 비 오는 밤에 기도한다. 내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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