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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QK Jul 01. 2018

500일의 썸머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바꾸는 것.”



 모든 연인들이 그들의 사랑을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랑을 두고도 누구에게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연으로, 또 누구에게는 메시아의 계시와도 같은 운명으로 인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썸머(Summer)(주이 디샤넬)와 톰(조셉 고든 레빗)은 서로를 좋아하지만 서로를 정반대의 방식으로 좋아한다. 

 톰의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톰 핸슨이 40만 개의 사무실과 9만 1천 개에 달하는 건물과 380만 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찾아낸 것은 이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운명.”

 정반대로 썸머의 대사는 지독히도 사랑에 대해 비관적이고도 염세적이다. “그쪽도 사랑은 안 믿잖아요?” “저도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환상일 뿐이에요.”

 정답은 없다. 절반의 물이 잔에 있는 것을 보고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표현하는 것과 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표현 것처럼 운명과 우연의 차이도 시각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썸머는 썅년이 아니고, 톰도 호구가 아니다. 단지 서로가 다른 시각으로,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썸머의 사고방식은 두 사람의 관계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즉, 우연이라는 것은 꼭 ‘그 사람’ 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우연히도 ‘그 사람’이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그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이지,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무한대에 가까운 대체 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반대로 운명이라는 단어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대체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톰은 썸머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그 ‘누군가’가 되길 원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톰은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주지하다시피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 속에서 꼭 그 사람 이여야만 하는 운명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톰은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지 못했다. 그녀와 의견의 폭을 좁히지 못했고, 운명인 줄만 알았던 썸머라는 고유명사를 전 여자 친구라는 대명사 속에 폐기하고 말았다. 모든 사랑에 실패한 이들이 그러하듯 톰은 철저히 우연에 입각한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마지막 장면의 내레이션은 그러한 톰의 감정을 웅변적으로 드러낸다. “우연. 그것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우연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없는 그러한 것이다. 톰은 마침내 기적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 여자는 Autumn(가을)이다. 그 순간 톰은 미소 짓는다. 

 톰은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다시 한번 바보 같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이별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여름이 온 다음에 가을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계절을 사랑하듯, 한 사람에 대한 사랑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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