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울 푸드
어쩌다 보니 주위에 국제결혼한 부부가 몇 있다.
글로벌 시대에 국제결혼이 낯 설일도 아니다.
국제결혼한 부부의 경우 젊어서 사랑하고 살 때는
사랑이라는 눈꺼풀이 씌어져 안 보이는 것들이 늙어가면서
보이게 된다.
외국에 사는 국제결혼한 부부의 경우 힘들어하는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게,
남자의 경우 늙으면 자기가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늙으면 늙을수록 그 강도는 더 세진다.
웬만한 외국에는 한식이야 널려있겠지만 엄마의 손맛이 들어간 한국 고유의
음식은 아무리 남편 입에 잘 맞는 요리를 해놓는 부인이라도
맞추기가 어렵다.
여자의 경우 ,
남편의 모국어 든지 제3국 언어든지 의사소통은 살면서 불편없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늙으면 늙을수록 모국어로 몇 시간 수다 떨고 받아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영어로 수다 떨 수 있는 친구야 있을지 몰라도 한국어인 모국어로
수다 떨 대상을 찾는 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종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과거보다는 쉬워졌다지만
페이스 투페이스에 모국어로 수다를 떨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게 제일
아쉬워하는 것들이다.
40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은
임종 전에는 말기암의 고통 속에 아무것도 드실 수가 없었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퇴원을 강요할 때다.
집으로 모셔서 마지막을 보내는 거다.
마지막에 드시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고, 어렵게 어렵게
전에 먹었던 냉면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배달음식도 없었다.
배달의 민족도 없었고 테이크아웃 Take-out 시스템도 없었다.
있다면, 중국집 철가방이 유일했다.
을지로 오장동 함흥냉면은 그 주위 일대에 자전거로 배달을 해주기는 했으나
거리가 멀면 배달 불가이다.
냉면이라는 음식이 장거리 배달이 불가능한 음식이다.
요즘처럼 CJ 동치미 냉면도 편의점의 HMR 도 없었다.
그렇다고 냉면이라는 음식이 집에서 만들 수도 없는 아이템이다.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간 동생은 그때 냄비와 보온병을 들고 오장동 함흥냉면집에
가서 사정사정해서 한 그릇을 냄비에 담고
육수는 보온병에 담아서
택시를 타고 뛰어 달리다시피 배달해왔다.
냄비와 보온병에 배달된 냉면은 그릇에 옮겨 부친께
드렸다.
이미 의식이 희미한 부친은 드실 수가 없었다.
그저 냄새만 맡고는 어쩔 수가 없으신 게다.
겨우 육수 몇 수저만 입에 겨우 넣어드렸다.
부친께서는 임종 전에 생각난 쏘울 푸드가 냉면이었다.
그로부터 2주 후에 돌아가셨다.
말기암 환자였던 부친은 예상한 대로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하셨지만
그나마 마지막에 쏘울 푸드를 드시고 가셨다.
앞으로 우리도 임종을 맞이할 게다.
그때 마지막에 내가 찾는 쏘울 푸드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해진다.
어릴 때 먹던 된장찌개에 김 몇 장 엊은 흰쌀밥일까?
- 이정도 라면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만
느닷없이
미디움레어 티본스테이크에 로마네꽁티 와인 한잔 먹고싶다...
고 하여 주위를 피곤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