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메마른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만
21.05.29
사주를 보러 갔다. 들어가서 내 기본적인 정보를 드리자마자 선생님께서 꺽꺽 웃기 시작하시더니 '울보구만!!' 라고 하신다.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울어버려 아주. 내가 울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아낸다구.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사주 보러 가는 길에도 친구에게 내가 요즘 편해진 어떤 사람과 만났다 하면 맨날 울어서 큰일이라고 호소했는데, 오늘도 친구가 보낸 카톡에 분식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 말고 눈물콧물을 질질 흘려댔는데. 어떻게 알고.
사주 봐주시는 선생님께 하반기 운세며 직업운, 등등 궁금한 걸 물어보다 막판에 갑자기 억울해서 '아니 근데 울보면 뭐 안좋은건가요??!?'라고 따져물었다. '울보여서 좋을 게 뭐가 있어!' 하고 호통을 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춘기 때부터 나는 눈물 비치는 것을 약해 보이는 것이라 생각해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했다. 나라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슬픈 책, 영화를 봐도 글쎄. 무덤덤했다. 나의 감정이 아닌 것에는 공감을 할 줄 몰랐고 내 감정은 억누르고 딱딱 접어서 아무도 못 보게 치워버리려 했다. 마지막 운 게 언제더라...?라고 생각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런데 내가 겉으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였고, 나는 보이는 것만큼 단단한 사람은 아니였다. 언젠가부터 마음이 고장나면서 때와 장소, 당시의 감정과 무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고 눈물이 자꾸 나니까 사람이 쳐지고 급기야는 아프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오랜만에 처음으로 현재 느끼는 서러운 감정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표현하며 서러움의 눈물을 죄책감 없이 흘릴 수 있었다. 몇 번의 상담 세션 끝에, 친구를 기다리며 서점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다, 뽀르뚜가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부끄러움 따위는 잊고 눈물을 콸콸 쏟아내는 자신을 보며 비로소 나의 감정과 표현기제가 싱크가 맞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아주 잘 운다. 그냥 수돗꼭지다. 내 일에도 눈물을 흘리고 너의 일에도 눈물을 흘리고 아예 남의 일에도 눈물을 흘린다. 혼자 전시를 보다 울고 책을 읽다 울고 영화를 보다 운다. 공공장소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민망해할지언정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내 눈물이 전시하는 감정의 진정성을 난 보증할 수 있고, 아는 사람이면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볼 테니 기왕이면 빨리 우는 모습을 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사람이면 저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아무렴 어떻냐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곧잘 울 생각이니까 좀더 예쁘게 우는 모습이나 연습해야겠다.
안 울던 시절의 나보다 잘 우는 지금의 나는 다양한 감정을 알아볼 줄도 알고, 내 감정에 좀더 솔직하다. 그래서, 울보인 내가 더 건강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울보 맞추신 건 용하지만 울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말씀은 틀리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