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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오에서이십육 Sep 05. 2021

처음이라는 것

사회생활 3년, 연애생활 N년차에서 돌아보는 처음

2021.08


나의 첫 회사에 작별을 고하는 인사 메일을 쓰면서, 시간을 되돌려 처음 입사하던 때를 떠올려 봤다.

대학을 마치고 들어온 첫 회사라, 쑥스럽지만 첫사랑 같아서 들뜬 마음이 항상 앞섰던 것 같습니다.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잘하고 싶고, 상대 마음도 내 마음만 같을까 조마조마하고, 작은 일에도 감명을 받곤 했습니다.

구차하기 그지없는 이 메일의 서두가 윗 분들 보기에 얼마나 하찮을까 싶으면서도, 어차피 나가는 마당이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보내버렸다.


  처음은 당사자와 그를 대하는 자 모두에게 어렵다. 처음인 자는 무슨 기대를 얼마나 걸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간절하고 벅차고, 그를 대하는 자는 변덕스러운 그의 기대치가 부담스러워 난감하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거의 일 년 반 동안 잔뜩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 의미를 해석하려 들었고 작은 칭찬과 실수에도 일희일비했다. 모든 상황은 괜찮게 했거나 아주 망했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뭐 그리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관여하고 있는 일이라면 그 성패도 내 책임인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중요한 문제를 찾아내고 싶고, 기대 이상의 아웃풋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늦은 시간까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기 일쑤였다.


  첫사랑도 그런 식이었다. 상대방은 수수께끼였고 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싶었다. 그도 내 모든 것을 알아줬으면 했고 그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모든 상황이 흑백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이 판단이 오락가락했고 감정은 항상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앞서서 눈물부터 터져 나오곤 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처음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다. 하필 너무나 착하고 감수성 넘치는 아이여서 안달복달하는 그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공유하지 않던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끝까지 모른 척했었다.  이젠 내가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실수할세라 불안한 동시에 잘하고 싶은 욕구가 이글거리는 눈망울이 나를 빤히 쳐다볼 때면 식어버린 나의 열정이 들킬세라 시선을 피했다.


처음은 어쩔 수 없이 미숙하고 찌질하다.

  처음은 어쩔 수 없이 미숙하고 찌질하다. 처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노련하고 차분해서 나만 더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게 처음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 반짝임은 오직 그때에만 누릴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채, 편견 없이 돌진하면서 타오르는 처음의 빛.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의 강렬함을 되살릴 수 없다. 그래서 처음은 아프더라도 소중하다. 그리고 처음은 차차 잊히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의 틀로 길이길이 남는다.


  이제 두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는, 이제 대부분의 일로부터 초연하다. 피드백을 받아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도 크게 거리낌이 없고, 특별히 최고로 잘하고 싶어 하지도, 일을 그르칠까 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몇 번의 사랑을 거쳐 가면서, 크게 기대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 데 점차 익숙해졌다. 좋은 회사, 좋은 사람에 만족하지만 처음이 아닌 것은 조금, 감흥이 덜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처음을 마주하게 될진 모르겠다. 하지만 또 처음이 온다면, 구질구질하더라도 최대한 격렬했으면 좋겠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처음처럼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는 순수함을 갖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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