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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꾸준 Nov 02. 2022

바른 사람

2021-08-22(일)_나홀로제시어 글쓰기

제시어 : 

- 사기꾼의 심장

- 급격한 도시화

- 술부터 마시고 온 사람들

- 실업자로 있었던 기간




“충신아, 너 지금 당장 회관으로 와야겠다.”

”지금요? 알겠어요.”


잠결에 전화를 받은 충신은 불안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40분이다. 이 시간에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일 일이 뭐가 있을까. 충신은 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막아줄 오래된 얇은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회관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렸다. 가는 동안 지금까지 이뤄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바른과 함께 이뤄왔던 것들을 떠올리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이 마을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것을 생각하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장님. 저 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모인 것 같은데요?”

“충신아, 너도 몰랐냐?”

“뭘요?”

“하, 너도 당한 거여.”


충신은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회관에 오기 전 술부터 마시고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고, 이장님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바른이가 사라졌어.”

“네? 바른이 형이요? 실종된 거예요? 어디서요?”

“충신아. 바른이는 실종된 게 아니라, 잠적한 거여.”

“잠적이요…?”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 중 자전거 가게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자전거 가게 아저씨는 곧장 나에게 달려와 내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넌 알고 있었지? 이바른 그 새끼 사기꾼인 거 알고 있었지?”

“왜 이러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장님이 자전거 가게 아저씨를 말렸다.


“아이고 김씨! 충신이 이 놈도 당한 거여. 우리처럼 멍청히 당한 거여.”


자전거 가게 아저씨는 충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더욱 격양된 목소리로 욕을 했다. 충신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인형처럼 머리가 흔들렸다. 이장님이 자전거 가게 아저씨를 충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자전거 가게 아저씨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거 우리 마누라 사망보험금이여. 그 돈이 우리 마누라 사망보험금이었다구.”


자전거 가게 아저씨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통곡했다. 주변 아저씨들이 달려와 자전거 가게 아저씨를 말렸다. 충신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고, 바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신은 회관을 뛰쳐나왔다. 속이 메스꺼웠다. 회관 앞 화단에 구토를 했다. 자기 전에 먹었던 보쌈과 비빔국수가 채 소화되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쏟아져 나왔다. 숨을 고른 충신은 곧장 바른의 집으로 뛰어갔다. 충신은 자신만은 바른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시멘트로 덮여있던 길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신호등이 생기고 LED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논과 밭이 있던 땅에는 10층짜리 건물들이 네다섯 개가 들어서고, 여러 가지 가게들이 생겼다. 아파트도 잔뜩 들어섰다. 10년 만에 이 마을은 시골이 아닌 도시가 되었다. 이 마을이 급격한 도시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마을 출신의 국회의원 덕이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도시인이 되어야 했고, 평생 농사만 짓던 분들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방앗간을 차린 분도 계시고, 음식점을 차린 분도 계시고, 이전부터 자전거에 관심이 많던 김 씨 아저씨는 자전거 대리점을 차렸다. 카페도 들어서고, 헬스장도 생겼다. 마을의 중심에 있던 마을 회관은 외곽으로 옮겨졌다. 처음엔 이장님도 마을 사람들도 심하게 반대를 했었다. 그때 이 마을 출신의 국회의원이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덕분에 마을회관은 최신식 설비를 갖춘 3층 건물이 되었다. 화장실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변기에는 비데가 설치되었다. 건물은 전부 시스템 에어컨으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그렇게, 마을은 아직 어수선했지만 도로와 가로등, 10층짜리 건물들은 차츰 정리가 되어 갈 때쯤. 10년 만에 바른이 서울에서 이 마을로 돌아왔다.


“충신아. 잘 지냈냐? 많이 컸네.”

“바른이 형!”


충신은 바른에게 달려가 안겼다. 


“형! 이제 마을로 돌아온 거야?”

“응 서울에서 일하다가 새로운 사업을 좀 해보려고 돌아왔어. 마을 사람들한테 도움도 좀 받고.”

“와 진짜? 형 진짜 멋있다. 정장도 엄청 멋있어! 차는 뭐야? 이거 외제차 아니야?”

“멋있기는. 꿈 찾아 상경했으면, 이 정도 해야 되지 않겄냐?”


바른은 bmw를 타고 왔다. 이 마을에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지만, 하루에 한 대 볼까 말까 하는 차를 바른이 타고 왔다. 충신에게 바른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바른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했다. 야망이 있었고,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바른은 언제나 도시를 꿈꿨고, 도시에서 살게 되었고, 도시에서 살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10년을 살다가, 도시가 된 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형, 근데 무슨 사업이길래 여기로 왔어?”

“충신아, 너 요즘 뭐해?”

“응? 나는 뭐, 집에 있지. 아버지 농사짓는 거 도와드리면서.”

“이 마을은 아직도 논밭이 있구나?”

“응, 마을 중심부는 다 발전되었는데, 외곽 쪽은 아직도 논밭이지 뭐.”

“충신아. 너 지금 시간 돼?”


바른은 충신에게 커피나 한 잔 하자며, 차를 태워 마을의 중심부로 향했다. 충신은 바른의 차가 신기하고 멋있었다. 자신이 bmw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 마을에 새로 생긴,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느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다. 


“충신아 너 커피 마시냐?”

“아니?”

“야, 아메리카노 정도는 마셔줘야 돼. 그래야 여자 친구도 사귀고 그러는겨. 여자 친구 없잖어 아직?”

“응. 아직 없지.”

“아메리카노 안 마셔서 그랴. 오늘부터 아메리카노 마셔.”


그렇게 바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두 사람은 밖에 도로가 보이는 쪽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앉아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중 진동벨이 울렸다. 충신은 빠르게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충신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의 테이블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바른은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젓더니 빨대로 커피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충신은 처음 마셔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른이 하는 데로 똑같이 따라 마셨다. 


“쓰지?”


바른은 충신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 미소 지었다. 


“형. 이딴 걸 왜 마시는 거야?”

“너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인생의 쓴맛을 알고 나면, 커피가 달게 느껴지는겨.”

“이게 달게 느껴진다고?”

“그럼. 너 요즘 하는 거 없다고 했지? 형이랑 같이 일 해볼래?”

“무슨 일인데?”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


바른은 충신의 궁금해하는 표정이 귀여운 듯 미소 지었다. 


“근데, 일단 돈이 좀 필요해.”

“나 돈 없는데?”

“네 돈 말고. 투자를 받아야지. 꽤 큰돈이 있어야 되거든.”

“얼마나…?”


-


“이장님. 저, 마을회관 3층에 비어있는 곳을 제가 사무실로 좀 쓰면 안 될까요?”

“뭐여? 뭔 일 하려고?”


마을 회관을 찾아간 바른은 이장님을 만나, 자신이 사무실이 필요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충신은 바른의 옆을 따라다니며, 바른을 관찰했다. 바른은 실행력이 뛰어났고, 겁이 없었다. 충신의 눈에는 바른이 한 없이 멋있어 보였다. 


“충신아, 랩탑 좀 열어볼래?”


충신은 바른의 랩탑을 열어 ‘사업계획서’라는 파일을 열었다. 


“이장님. 제가 여기서 하는 일은 사무나 행정, 회계 같은 일이고요. 실제로 저희 제품 생산하는 공장은 제천에 있어요. 보시면 이게 저희 공장 사진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뭘 생산하느냐.”


바른은 이장님께 다음 페이지를 보여줬다. 


“아프리카에 물 부족 국가 많잖아요. 제가 거기에서 깨끗한 물을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어요. 이 사람들 보이시죠? 이런 물을 마시면서 살아요 애들이. 불쌍하잖아요. 저는 이런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근데, 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자금이 좀 부족하거든요.”

“뭐여, 돈이 필요한겨?”

“사업에 돈은 무조건 필요하죠 이장님. 근데, 제가 이 사업을 구상하느라 실업자로 있었던 기간이 길어져가지고 대출이 안 나와요. 정부지원도 좀 알아보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이게 나라랑 협약이 된 거라 생산만 하면 되는데, 생산할 돈이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여?”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마을 분들의 도움을 받아보고 싶어요. 여기 사무실에서 제가 충신이랑 일 하면서요. 설득은 제가 할게요. 사무실 임대 비용은 제가 매월 드릴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구요.”

“그려, 월세는 됐으니까 일단 한 번 해봐.”

“고맙습니다 이장님!”


바른은 이장님의 손을 붙잡으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업 아이템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 사업이 성공하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얻게 되는지 설명했다. 


“이장님. 이 제품 원리가 뭐냐면요.”

“바른아. 나는 뭐 너가 말해도 모르겄다. 똑똑한 너가 하는 것이니 알아서 잘하겄지. 허허.”

이장님은 다음 주부터 그 사무실 쓸 수 있게 정리해두겠다고 했다. 충신은 바른과 함께 기뻐했다. 

“충신아. 오늘 삽겹살에 소주 한 잔 해야겄다.”

“좋지 형!”


-


워터 프라우드.


바른은 충신과 함께 제천에 있는 바른의 회사 공장을 찾아왔다. 


“형네 회사 공장이야. 멋있지?”

“와, 형. 대박이다. 워터 프라우드? 회사 이름이야?”

“응. 아. 오늘 토요일인가?”

“응. 토요일.”

“아, 충신아 미안하다. 주말이라 공장 쉬는 날이네. 내가 당직하는 경비 아저씨한테 전화 한 번 해볼게. 못 들어갈 수도 있겠다.”

“아 진짜? 어쩔 수 없지 뭐.”

“응 기다려봐.”


바른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하자 자신이 워터 프라우드 대표 이바른이라고 얘기하며 공장 문을 열어줄 수 있냐며 양해를 구했다. 대표라는 단어가 충신에게 참 멋지게 다가왔다. 1분여간 통화를 한 후에 바른은 충신에게 주말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미안해했다. 


“괜찮아 형. 다음에 보면 되지.”

“그려. 미안하다 형이 요일을 착각해가지고… 다음엔 평일에 같이 오자.”


두 사람은 바른의 bmw에 올라탔다. 내비게이션은 마을회관을 향했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대범해?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하고. 대단해.”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내가 가진 거 보여주면 그뿐이니까. 충신아, 사업가랑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여.”

“사기꾼이랑?”

“응, 가진 걸로 사람을 설득하느냐. 없는 걸로 사람을 설득하느냐. 사람 설득하는 건 똑같은겨. 그러니깐, 사업가는 사기꾼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인 거여. 이해되냐?”

“음… 조금은?”

“그러니깐 내가 하는 일들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거여. 왜인 줄 알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걸로 사람들 설득하는 거니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잖어. 사실대로만 말하면 되는 거지.”


사업가는 자칫하면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바른의 말에 충신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


바른이 충신과 함께 새로 들어선 상가의 사장님들을 직접 만나면서 설득하러 다녔다. 충신은 바른의 옆에서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거들었고, 바른을 대신해 운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를 사 오기도 했다. 이번에 바른과 충신이 들어갈 곳은 김 씨 아저씨의 자전거 가게였다. 


“아니 이게 가능한 거여?”

“아, 그럼요. 제가 저희 회사 수익구조랑, 수익률 보여드렸잖아요. 제가 거짓말 하나 없이 다 알려드린 거예요. 원래 이거 대외비 구, NDA 써야 알려드리는 거예요.”

“뭐? NBA?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 이렇게 되면 누구나 다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럼요. 이 설명 들은 분들 다 하셨어요. 절대 손해 볼 일이 없거든요. 보세요. 1,000만 원만 넣어도 한 달에 40만 원씩 드리고 1년 지나면 원금도 다시 돌려 드리잖아요. 어떤 은행도 한 달에 이자 4프로씩 주는데 없어요. 1년이면 480만 원이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이게 불가능한 수치가 아니라니깐요? 요즘 돈만 넣어서 이렇게 돈 벌어갈 수 있는 게 없어요. 아시잖아요? 주식? 원금 다 날아가면 누가 책임져요?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이게, 집사람 목숨 값이라.”

“아저씨. 이거 돈을 다 넣지 마세요. 분산투자를 하셔야죠. 소액만 여기에 넣어두시고, 나중에 확인하고 넣으면 되니까. 100만 원만 넣어보시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리고 저 못 믿으세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이바른 아닙니까?"

"아니, 그건 내가 알지."

"이 마을은 제 고향이에요. 고향 사람들 다 잘 살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제가 서울에서 10년간 살아보니깐, 삭막해요. 조금만 틈 보이면 뒤통수 치고 그래요. 고향만큼 따뜻한 곳이 없다니까요?"

"그럼. 고향만 한 곳이 없지."

"사장님, 저기 건물들 보세요. 여기도 이제 완전 도시가 되었잖아요. 사장님도 이 마을이 변한 만큼 변하셔야 돼요. 제가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돈 저한테 투자 안 하셔도 되니깐. 꼭, 재테크하시구요."


바른은 김 씨 아저씨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저씨. 저 어릴 때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아저씨 아들 경수. 경수도 공부시켜서 저처럼 서울 보내셔야죠. 과외도 시키고 학원도 보내고, 나중에 등록금도 내주고 하려면 돈 필요하잖아요. 저 정말 아저씨 걱정돼서 그래요. 


자전거 가게 김 씨 아저씨는 바른이 꺼내 놓은 투자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바른은 투자 계약서를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저씨. 진짜 신중하게 생각하시고 결정하세요. 제가 다음 주에 다시 올게요."

"아녀, 지금 써."


바른은 가방에서 투자 계약서를 다시 꺼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꼼꼼히 읽어보시고 서명하세요."

"아녀, 바른이 너가 하는 거를 뭘 의심을 햐."


바른은 김 씨 아저씨의 투자 계약서를 가방에 넣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려, 열심히 혀. 내가 믿으니께."


-


바른은 금세 투자자를 모았다. 처음에 긴가민가 했던 사람들도, 실제로 다음 달에 원금의 4%가 자신의 통장에 꽂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투자금을 늘리려는 사람들로 마을회관이 붐볐다. 마을회관 3층의 사무실에서 충신은 사람들을 줄을 세웠다. 그리고는 방문한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주었다. 


"여러분! 지금 저희 점심시간이라 순서대로 제가 번호표를 나눠드릴 테니깐요! 점심식사들 하시고 오후 2시까지 오세요!"


충신은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1번부터 번호표를 나눠주었다. 그 번호는 34번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니, 바른이가 좋은 일 하는 거래잖어?"

"그럼, 바른이가 누구여. 우리 마을의 자랑. 서울대생 아니여!"

"그렇지. 그리고 이 돈으로 뭐 저기 아프리카 물 못 마시는 아가들 돕는다는 거 아니여?"

"맞아. 맞아. 우리 마을 사람들이 팔 걷고 도와줘야지!"


줄을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의 대화는 바른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영이 엄마는 얼마 넣었어?"

"나는 천? 민지 엄마는?"

"나는 우리 애 아빠 퇴직금까지 싹 해가지고 3억 했어."

"어머어머! 좋겠다. 우리 애 아빠는 의심이 많아가지고. 천만 넣었는데. 지난달에는 10%씩 줬으니까 3천만 원은 나왔겠네?"

"그러니까! 그 10% 받는 거 다시 투자해서 매달 복리로 받으려고! 아예 통장에 넣지 말고, 투자금으로 쭉 써달라고 할까 봐. 나중에 3년만 묵혀도 얼마야?"

"불안하지 않아?"

"뭐 어때, 바른이가 나쁜데 쓰는 것도 아닌데. 서로 좋은 거지."

"나도 우리 애아빠한테 말해야겠어."


서로 얼마씩 넣었는지 확인하며,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실망하고, 누군가는 콧대가 높아지는 대화들도 한 가득이었다. 


-


"충신아. 안 힘들어?"

"돈 버는 건데. 뭐가 힘들어. 형은?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일했잖아."

"응. 이번에 지부티랑 코모로라는 나라랑 또 계약을 하게 되어가지고, 이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

"와, 그런 나라들도 있었어?"

"그럼. 아프리카 대륙이 얼마나 큰데. 엄청 많은 나라들이 있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시고 사는 아이들도 그만큼 많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렇게 작은 여과기 밖에 없는 게 속상하다."

"형. 이 여과기는 혁신이잖아! 고작이라니! 형 정말 대단한 거야!"

"고맙다 충신아. 힘이 되네. 오늘 막걸리나 한 잔 할까?"

"좋지!"


바른과 충신은 시내의 한 전집을 찾아 들어갔다. 비가 내리는 저녁의 시내는 왠지 쓸쓸하고 고요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가 도로에 고인 물을 밝고 지나가는 소리들이 그 적막함을 달랬다.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때쯤 파전과 막걸리가 나왔다. 


"충신아. 형이 스무 살 때 학교 간다고 서울 갔잖아. 10년 전이네 벌써."

"응. 그렇네. 나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 딱 내렸어. 그때 이제 짐도 많고, 그랬지.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입구로 가야 되는데. 도통 길을 모르겠는 거야. 그때, 근처에 중학생?처럼 보이는 애들이 있더라고. 그래서 지하철 타려면 어디로 가야 되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걔네들이 서로 쳐다보더니 낄낄 웃어."

"엥? 뭐야 무시하는 거야?"

"그랬겠지. 아마도. 그랬더니 어디 역까지 가녜. 서울대입구역 간다고 했더니. 길을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지하철을 잘 탔어."

"아 그래? 착한 애들이었네."

"한참 타고 가다 보니깐, 반대로 가고 있네 열차가."

"반대로 알려준 거야?"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 한 30분 타고 가다가 알았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

"뭐, 이게 지하철 2호선이 순환을 하거든? 그래서 지금 내려서 반대방향을 타나, 이대로 쭉 가나 30분 걸리더라고. 그래도 얘네들이 나한테 거짓말은 안 했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근데 그 순간이 너무 비참한 거야. 걔네들은 어릴 때부터 지하철을 타 왔으니깐 그게 얼마나 쉬운 일이었겠어."

"그렇지."

"그 쉬운 일도 모르니깐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거지."

"맞네."

"요즘 그때 생각이 자주 나."


말을 마친 바른은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켜 비워냈다. 


"충신아. 이거 파전 좀 잘라줘라."

"아, 어."


충신은 젓가락을 들어 바른이 집은 파전의 밑부분을 잡아주었다. 


-


뉴스에서는 최근 1년간 엄청난 수천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희대의 사기에 대해 연신 보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30대 청년은 사진과 영상을 조작하여 투자자들의 눈을 속이고, 투자금을 챙겼다. 투자금의 원금에 따라 일정 비율로 이자를 지급했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를 형성하게 했다. 1억을 넣은 사람은 다음 달 자신의 통장에 4백만 원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원금이 보장된다는 계약서의 내용만을 믿고 투자했던 사람들은 알고 보니 이자가 아니라 자신의 투자금에서 그 돈을 받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분개했다. 그렇게 수천 명이 투자한 금액의 총피해액이 약 300억에 달한다고 했다. 적게는 100만 원부터 많게는 10억까지도 투자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통장에 찍히는 이자만 보고 원금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청년은 자신의 고향이라는 점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신뢰를 얻은 이후에는 다단계 형식으로 투자금을 계속 유치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목표한 금액에 도달하자,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현재 아직도 경찰들은 그의 행방을 쫓고 있다.


-


"충신아. 오늘은 마을회관에서 투자설명회 할 거니깐 지금 마을회관으로 와."

"지금? 알겠어 형."


충신은 가을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막아줄 오래된 얇은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회관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렸다. 가는 동안 앞으로 이뤄나갈 일들을 떠올렸다. 투자금을 모아서, 공장에서 휴대용 여과기 생산도 대폭 늘리고, 아프리카로 수출하고. 사무실에서 직원도 새로 뽑고. 사업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 바른 혼자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형. 내가 뭐 좀 도와줄까?"

"어, 충신아. 사무실에서 내 노트북이랑 HDMI 케이블 좀 가져다 줄래? 그리고 이거 프로젝터 리모컨도 이장님한테 찾아달라고 하고."

"프로젝터 리모컨?"

"응. 여기가 건물은 최신식인데, 어르신들이 쓰실 일이 없어서. 어디다 두셨을 텐데 못 찼겠어서. 한 번 물어봐 줘."

"알겠어!"


충신은 이장님께 달려가 프로젝터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뭐? 프로 뭐라고?"

"이장님. 저거 저기 회의실 천장에 달려있는 저거 켜고 끄는 리모컨이요!"

"아 그거? 잘 모르겠는데. 창고 한 번 찾아보려?"

"네, 알겠어요."


충신은 창고 구석에 먼지 쌓인 리모컨을 발견했다. 군대에서 봤던 프로젝터 리모컨과 같은 모양이었다. 충신은 리모컨을 들고 바른에게 달려갔다.


"형! 찾았어."

"고맙다 충신아. 이제 곧 사람들 올 거 거든? 음료수랑 간식 좀 저기 책상 위에 이쁘게 올려둘래?"

"오케이! 내가 또 군대에서 이런 거 잘했었지!"


바른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충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충신은 일회용 접시 위에 갖가지 과자들을 이쁘게 올려두었다. 각 자리마다 비타민 음료 한 병씩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바른과 충신은 잠시 의자에 앉았다.


"형. 안 떨려?"

"떨릴 게 뭐 있어. 그저 사실대로 얘기하는 건데."

"형 대단하다."

"대단하긴 무슨."


바른은 충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하는 사이에 마을 회관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충신은 일어나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아저씨! 오셨네요! 이거 받아 가세요! 사업계획서예요."

"그려? 봐도 뭔 말인지 잘 모를 거 같은데."

"그래도 일단 받아보세요! 바른이 형이 똑똑해서 잘 설명해 줄 거예요!"


충신은 마을 회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사업계획서를 일일이 나눠주었다. 회의실에는 마을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충신은 회의실을 불을 껐다. 프로젝터를 통해 회의실 앞에는 '워터 프라우드' 공장의 모습이 배경으로 있는 화면에 '워터 프라우드 투자 설명회'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바른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 마을의 청년! 이 바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박수로 바른의 투자 설명회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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