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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Mar 05. 2018

대충의 맛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이상한 제목이 눈에 띄어 책을 집어 들었다.

『안자이 미즈마루 :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란 제목이었는데, 대충 그린 그림이면 대충 그린 그림이지 마음을 다해 대충은 뭐란 말인가 하며 책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악. 진짜 대충 그렸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그의 그림을 다 살펴봤는데, 마음을 다해 그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다 대충 그린 것만은 확실했다. 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칭찬입니다.)  


누구라도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사람의 그림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고. 맞다.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을 거다. 하지만 이런 그림으로 계속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절대 많지 않다. 거기다 그는 아주 성공한 작가였다. 젠장, 부럽다.

만약 내가 이렇게 대충 그린 그림을 클라이언트에게 보낸다고 치자. 그러면 바로 이런 요청이 들어올 것이다. “작가님, 좀 더 성의 있게 그려주세요. 저희가 30만 원이나 드리는데 거기에 맞는 완성도는 아니네요.” 그러면 나는 “어이쿠, 그거 완성작은 아니고요. 스케치를 실수로 잘못 보낸 모양입니다. 하하.” 하면서 다시 그려야만 했을 것이다. 아무나 대충 그리고 싶다고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안자이 미즈마루니까 그렇게 그릴 수 있는 거다. 대충 그린 그림으로 세상을 설득했으니까. 뭐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클라이언트는 설득했겠지?

“어머, 안자이 선생님의 그림은 대충 그렸는데도 너무 좋아. 돈이 아깝지 않다니까.”


대충 그린 그림 얘기를 하다 보니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만화가 ‘이말년’이다. 그는 그림을 못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만화계의 대선배 ‘허영만’이 그의 그림을 보고 만화가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을 만큼 혼돈의 그림체를 자랑한다. 어쩐 일인지 나에게 그의 그림은 못 그린 게 아니라 개성으로 느껴지지만.

그런 그림 실력에 대해 이말년 작가 본인은 최선을 다해서 그리는데 그 정도밖에 못 그리는 거라 겸손하게(?) 말하지만 조금 의심스럽다. 몇 년을 그렸는데도 그의 그림체는 그대로다. 그림은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기 마련이다. 왜 그 유명한 『슬램덩크』도 처음과 마지막의 그림이 확연히 다르지 않나. 만화를 그리는 동안 작가의 그림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다른 만화책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말년의 그림이 몇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그림 실력이 늘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두고 그리는 게 분명할 리는 없고, 그냥 잘 그리고픈 마음 자체가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대충 그리는 거다. 따지고 보면 잘 그릴 필요도 없다. 이말년 만화의 참맛은 ‘병맛코드’로 불리는 황당한 전개와 내용이므로 지금의 황당한 그림체가 딱이다. 매끈하게 잘 그린 그림으로는 그 맛이 안 난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체는 이미 완성된 스타일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는.


대충 그린 그림에는 그 특유의 맛이 있다. 잘 그린 그림에선 느껴지지 않는 그런 맛. 잘 그리려 하지 않아서 드러나는 매력. 그런 것들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득당하고 만다.

“대충 그렸는데 이상하게 좋다.”

“못 그려서 더 재미있군.”  

무엇보다 대충 그려서 세상에 툭 하고 던져놓는 그 대범함이 좋다.  그들처럼 대충 그려서 먹고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겠지만 대부분은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왜냐면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다. 나도 대충 그려서 먹고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겁이 났다. 내가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 그런 건 감각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그렇게 나를 믿지 못하고 그냥 포기해 버렸다. 남들처럼 열심히 그려서 먹고사는 게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달까.

이처럼 대충 그린 그림으로 먹고사는 건 웬만한 배짱으론 힘든 일이다. 대충 그린 그림을 클라이언트에게 들이밀고 돈을 주시오 당당하게 말하려면 스스로 굉장한 소신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결국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해 부딪히지 않고서는 대충 그려서 먹고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왜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멋대로 해석이다.) 나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 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비겁하게 남의 눈치나 보면서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을 그렸다. 아아,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 마음을 다하지 않은 그림을 세상에 내어놓다니, 부끄러운 짓이다. 앞으로는 다르게 살 거다. 그러니 클라이언트들은 들어라.

“성의 없는 게 아니고 마음을 다해 그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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