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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Apr 02. 2018

어른의 마음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어색함을 없애려 던지는 “제가 재미있는 얘기해드릴까요?” 유의 실없는 농담이다. 이미 클래식이 된 이야기라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허락한다면 한번 이야기해보겠다. 흠흠.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

“왜 그러니, 애야.”

“선생님들은 저를 피하고, 아이들은 저랑 안 놀아줘요. 학교 가기 싫어요. 오늘은 학교에 안 갈 거예요!”

그랬더니 엄마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넌 교장이잖니.”

아이고 내 배꼽.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건 고등학생 무렵이었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좋아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취향 저격이랄까. 사실 재미도 재미지만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식스 센스’ 급의 반전이다.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주인공이 교장 선생님이었다니.

모든 고등학생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학교에 가기 싫었다. 수업은 지루하고, 우리를 가두고 억압하는 선생님들에게 괜한 반감을 품었다. 그럴 때 들은 이 이야기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주었다.

‘아, 선생님들도 학교에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건 아니겠구나. 우리랑 똑같네.’

지금 들으면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그때는 어른의 입장이나 기분 따위를 신경 쓸 주제가 못 되었다. 무려 고등학생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선생님들이 달리 보였다. 저 선생님도 오늘 학교 나오기 싫었을까? 애들이 말을 이렇게 안 들으니 얼마나 때려치우고 싶을까? 처자식 때문에 참는 거겠지? 밉기만 하던 선생님들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역지사지’라는 고급스러운 사자성어로도 깨우치지 못한 걸 유머를 통해 배웠으니 나에겐 특별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내게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회사에 다닐 때의 이야기다. 출근하기 싫던 어느 날, 이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웃을 수 없었다. 아아, 나는 교장 선생님에 완전히 빙의될 만큼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회사엔 가야지, 난 회사원이니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출근하던 지하철 안에서, 어쩐 일인지 이 이야기로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나도 학교 가기 싫어』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에 선정된 책이라는 건 안 비밀. 그만큼 좋은 책이란 얘기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어 몸부림친다. 학교에 가면 교장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고, 학부모와의 만남은 언제나 긴장되고, 무엇보다 애들이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 이대로 도망쳐서 여행을 떠날까. 이런저런 상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마음을 먹는다.

“그래도 학교에 가야지. 왜냐면 난 선생님이니까.”

우리 주인공은 이 역경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어린이들이 읽을 건데 주인공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선생님이라니. 교육상 안 좋은 거 아닙니까? 딴지를 걸어올 사람도 있을 것 같아 변명하자면, 아이들이 선생님을 마음껏 비웃길 바랐다. ‘와하하, 선생님이 뭐 이래.’ 그렇게 웃으며 학교와 선생님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기를. 그러다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생각에 이르겠지. ‘선생님도 나랑 똑같구나. 나만 학교 가기 싫은 게 아녔어.’ 무섭고 멀게만 느껴졌던 선생님이 친근하게 느껴지며 묘한 동지애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선생님과 학생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게 되는 거다. 이 모든 걸 다 계산해서 그림책을 만들었다는 건 솔직히 방금 지어낸 얘기고, 그냥 어른도 놀고 싶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깊은 뜻은 없다.

철저하게 어른의 마음으로 그렸다.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데 어린이의 마음으로 그려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거 못한다. 나는 어른이니까 아이의 마음 따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이건 안다. 어른의 마음이나 아이의 마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그러니 어른의 마음으로 그림책을 그려도 괜찮다. 그게 곧 아이의 마음이니까. 가끔은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속에 아주 어린 아이가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나는 아직 어린애인데 겉모습이 이렇게 늙어버려 어쩔 수 없이 어른인 척하면서 산다.


종종 이 그림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선생님이나 부모를 통해 전해 듣는다. 아이보다 자신이 더 재미있게 읽었다는 고백과 함께. 이렇게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인데 왜 안 팔리는 거냐고요(지금은 절판되었다).

재미있는 건 이 그림책을 그리던 내 모습이다. 당시 회사에 다니던 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일 밤, 그림을 그리면서 소리쳤다.

“아아, 그림 그리기 싫어! 내가 왜 이걸 그린다고 했을까!”

우습지 않나? 학교 가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그리는 그림 그리기 싫어하는 그림 작가라니.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내 삶엔 웃을 일이 넘쳐난다.


방금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힘든 일 앞에서 아이는 웃지 않지만 어른은 웃을 수 있다. 연륜에서 오는 여유인지 체념인지 아니면 해탈인지 알 수 없지만 웃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힘이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할 때는 분노보다 웃음이 도움이 된다. 덕분에 아무도 죽이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끝낼 수 있는 거다. 우리가 괜히 해학의 민족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웃기 위해 그림책을 그렸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다 웃자고 하는 얘기. 모조리 웃음으로 승화시켜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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