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하완 Apr 12. 2018

20세기 면도 클럽







 몇 년 전부터 클래식 면도기로 면도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클래식 면도기는 ‘안전면도기’ 혹은 ‘양날면도기’로 불리는 면도기다. 얇은 직사각형 모양의 양날 면도날을 끼워 사용하는 수동식 금속 면도기 말이다. 면도날도 면도기도 20세기 초반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AI가 바둑을 두고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는 21세기에 시대를 역행해 20세기 기술을 사용하다니 좀 미련하다 싶겠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질레트’나 ‘쉬크’에서 만드는 카트리지 면도기를 썼다. 5중 면도날이 피부 속 숨은 수염까지 깨끗하게, 어떤 굴곡에도 자유롭게 꺾이는 헤드가 밀착 면도를, 피부 자극을 덜어주는 윤활 밴드가 부드러운 면도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광고는 한 번쯤 봤을 것이다. 확실히 카트리지 면도기는 간편하고 잘 깎인다. 문제는 카트리지 면도날이 더럽게 비싸다는 거다. 위생이나 무뎌짐을 생각하면 면도날을 자주 바꿔줘야 맞지만 면도날 하나에 사 오천 원씩 하니, 아까워서 잘 안 깎일 때까지 쓰게 되더라. 무뎌진 날로 면도를 하다 피를 본 어느 날, 울화가 치밀었다. 이게 이렇게 비쌀 이유가 뭐란 말인가. 최첨단 기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뭔가 필요 이상의 것을 강요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것도 마음껏 사지 못하는 내 처지에 화가 났고, 왜 하필 남자로 태어나 면도를 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는지 한탄했으며, 종국엔 내가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건 좀 과장이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화가 났다.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여러 가지 대안을 검색하던 중 클래식 면도기를 알게 되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쓰던 구식 면도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면도기를 쓰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것도, 다양한 브랜드에서 줄기차게 생산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나는 클래식 면도기와 사랑에 빠졌다.

 ‘아, 아름답다.’

 그동안 내가 써오던 면도기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질레트의 카트리지 면도기를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뭔가 최첨단의 기술을 잔뜩 담고 있는 듯한 미래지향적 디자인은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다. 단순한 디자인, 단순한 기능. 값싼 플라스틱이나 고무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금속 재질의 묵직한 외형. 상남자의 면도기. 클래식 면도기야말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면도기였다(나는 단순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불편하고 아날로그적인 물건에 끌리는 변태 같은 취향이 있다). 그래, 결심했어. 평생 면도를 해야 하는 것이 남자의 숙명이라면 이왕이면 예쁜 거로 해보자. 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면도기 세트를 구입하고 말았다. 이게 다 비싼 면도날 때문에 시작된 것도 잊고 말이다. 어쩌면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클래식 면도기로 면도를 하려면 우선 비누 거품을 만들어야 한다. 향이 좋은 면도 비누에 젖은 오소리 털 브러시를 문질러 거품을 낸다. 그 거품을 손바닥만 한 볼에 옮겨와 브러시로 저어주며 부드러운 거품을 만든다. 이게 달걀로 거품을 내는 머랭 치기와 비슷한데, 브러시를 빠르게 저어줘야 머랭처럼 부드럽고 쫀쫀한 질감의 거품을 얻을 수 있다. 가끔 손목이 아플 때까지 거품을 만들다 보면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별수 있나. 펌프만 누르면 쉬-익 적당한 거품이 나오는 간편한 쉐이빙 크림이 있지만 클래식 면도에 그런 인스턴트를 쓸 수는 없는 노릇. 100년 전 남자들이 행했던 방식을 고수하고 싶다. 그래야 클래식 면도다. 휴, 전통을 지켜간다는 게 쉽지 않다.

 거품이 만들어지면 거품을 얼굴에 처덕처덕 바르면 된다. 산타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그러고 나면 이제 아름다운 크롬 재질의 면도기가 등장할 때다. 클래식 면도기는 힘을 주어 그으면 안 된다. 안전망이 따로 없기에 무리하게 힘을 주다간 세면대가 새빨갛게 물드는 걸 보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손에 힘을 빼고 그저 묵직한 면도기의 무게로 내린다 생각하면 다칠 일 없이 안전하니까. 조금만 해보면 감이 온다. 면도기가 지나가며 풍성한 하얀 거품을 걷어낸다. 거품이 다 걷히면 또 거품을 바른다. 한 번에 깨끗하게 밀어버리려 말고 조금씩 수염의 길이를 줄여간다는 느낌으로 여러 번에 나눠 면도하는 인내와 여유가 필요하다.

 옛날 방식의 면도기로 면도가 잘 될까. 나도 의문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아무래도 카트리지 면도기에 비해 면도가 덜 된 느낌이 든다(내 기술 탓도 있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카트리지는 5중 날이 아닌가. 한번 그을 때마다 5개의 날이 얼굴 위를 지나간다는 얘기다. 털끝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다. 거기다 피부 속에 들어있는 털까지 당겨서 잘라내는 기술이 있으니 카트리지 면도기의 성능은 완벽에 가깝다. 그런데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란다. 그런 기술 때문에 인그로운 헤어(ingrown hair)가 생기고 피부 자극도 심해 피부 트러블이 생긴다고. 반면 클래식 면도기는 무리하는 법이 없다. 한번 그을 때 단 하나의 칼날만이 피부 위를 지나가며 피부 밖으로 나온 수염만 제거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깔끔한 인상을 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딱 좋은 정도의 면도라고 말하고 싶다. 확실히 피부 트러블도 없다.


 클래식 면도기로 바꾸고 면도가 좋아졌다.

 원래 나는 면도하는 걸 굉장히 귀찮아했다. 더 깨끗하게,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카트리지 면도기로 면도를 하면 5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게 그렇게 귀찮았다.

 클래식 면도기로 바꾼 후, 면도하는 풍경이 바뀌었다. 음악을 선곡하는 것으로 면도가 시작된다. 욕실에 좋아하는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면 모공을 열어주기 위해 뜨거운 물을 받아 천천히 세안을 한다. 이젠 제법 능숙하게 비누 거품을 만들고(손목은 여전히 아프지만)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면도를 한다. 그래 봤자 걸리는 시간은 서너 곡의 노래가 플레이되는 정도다. 어느새 나는 면도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시간도 더 길어지고 불편해졌는데 귀찮기만 했던 면도가 어떻게 즐거운 일이 되었는지, 이 오래된 기술이 내게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면도기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복수를 위한 총을 주문 제작하는데 손잡이에 장식을 넣은 굉장히 예쁜 모양의 총을 주문한다. 총이 잘 나가면 됐지 뭘 그리 모양에 신경 쓰냐는 제작자의 말에 금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 그렇다. 뭐든지 예쁜 게 좋다.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빠르게 해치우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취향에 맞는 물건을 천천히 가지고 노는 시간이랄까. 복수도 면도도 천천히 해야 제맛이다. 응? 무슨 박찬욱 감독이 할 법한 이상한 소리를. 아무튼, 20세기의 면도가 좋다.


 



 아, 참고로 클래식 면도기는 반영구적이고 면도날은 아주 저렴해서 쓰면 쓸수록 경제적입니다. 뭐야, 무슨 홍보대사도 아니고.(웃음)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의 마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