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독립을 했다. 늦었다면 늦은 나이, 그만큼 오랫동안 꿈꾸던 독립이라 설레었다. 드디어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인가.
그때까지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건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가족 누구도 자기 공간을 가지지 못했다. 작은 집에 프라이버시는 사치다. 모든 곳이 공용이며 오픈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의 공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수 있는 피난처에 항상 목이 말랐다.
서울을 떠나 인천의 작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하던 날 조금, 감격했다. 비록 월세로 사는 집이지만 내 힘으로 공간을 얻었다는 게 스스로 대견했다. 모든 게 더딘 나라서 이 작은 방구석을 얻는데 참으로 오래 걸렸다. 감격도 잠시, 내겐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인테리어. 오랫동안 내 공간을 꿈꾸며 그려오던 모습이 있었다.
"내 공간이 생기면 예쁘게 꾸밀 거야. 나만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야지."
인터넷에서 맘에 드는 인테리어 사진을 볼 때마다 나중에 참고할 요량으로 저장해 두곤 했다. 이제 그것들이 빛을 발할 때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멋진 공간을 만들 생각이었다. 계획은 그랬다. 필요한 가구와 집기들을 물색하면서 계획은 무참하게 찢겨 나갔다. 혼자 사는데 필요한 물건은 다섯 식구가 사는데 필요한 물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사야 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작은 그릇부터 소금이나 간장 같은 기본 재료, 조리도구, 각종 가전제품, 옷걸이, 침구, 빨래 건조대, 커튼…… 끝이 없었다. 한 사람이 생존하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할 줄이야. 항상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동안 내가 다 갖춰진 상태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나는 빈손.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채워야 했다.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눈만 높아서 맘에 드는 물건들은 죄다 비쌌다. 주제도 모르고 '디터 람스'의 가구를 탐하다니. 내가 살 수 있는 가구는 저렴한 조립식 가구가 전부였다. 침대도 못 사서 그냥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고 지냈다. 그 놈의 돈이 문제다. 누구나 좋은 취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내가 산 물건들은 진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 취향이 아닌 그릇을 사고, 내 취향이 아닌 옷걸이를 사고, 내 취향이 아닌 가구를 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은행을 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취향이 구리다고 비웃지 마시길. 인생 최초의 인테리어를 진행하며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인테리어는 타협이다.'
정말 타협의 연속이었다. 많이 내려놓고 많이 비웠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게 되니까 말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27살의 뉴요커다. 그녀의 꿈은 성공한 무용수가 되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정식 무용수가 되지 못한 가난한 연습생이다. 그녀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꿈은 거대한데 재능은 좀 없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연습생에서도 잘린다. 이제 정말 설 곳이 없다. 마침 자리가 비었으니 무용단 사무직으로 일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연출가의 제안을 받지만 단칼에 거절하는 그녀.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댄서가 꿈인 사람에게 사무직을 권하다니. 무용수로는 가망이 없다는 얘긴가?
프란시스는 영화 내내 거처를 옮긴다. 궁핍한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 셰어하우스에서 살기도 하고, 고향 부모님 집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고, 자신이 졸업한 대학의 기숙사 방을 얻어 지내기도 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모습이 마치 청춘의 불안함을 시각화한 것 같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정해진 것이 없어 모든 것이 혼란한 젊음의 한복판. 그녀는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주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프란시스는 결국 무용단의 사무직 자리를 받아들인다. 무용수의 길은 포기(?)했지만 안무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집을 구한다. 누구와도 나눠 쓰지 않고 눈치 볼 필요 없는 자기만의 방을. 비로소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듯 행복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던 그녀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FRANCES HALLADAY'
우편함에 이름을 꽂으려는데 종이가 다 들어가기엔 자리가 좁자 무심하게 종이 뒷부분을 접어 길이를 맞추는 그녀. 그렇게 우편함 명함 칸에 'FRANCES HA'라는 이름이 꽂힌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제목이 왜 '프란시스 하'인지 밝혀지는 엔딩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온다. 어찌 이것을 실패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실패담이 아닌 성장담이다. 우리 모두가 겪었고 겪어야 하는 성장. 온전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잘린 이름처럼 반쪽짜리 모습일지라도 괜찮은. 때론 주어진 틀(현실)에 자신을 맞춰가는 유연함도 필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자리는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다시 인테리어 얘기로 돌아와서, 내 이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의 방을 둘러보며 든 생각은 ‘나쁘지 않네’였다. 어찌 됐든 이 어설프고 아늑한 곳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공간이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네. 오 사랑 나의 방구석. 나 역시 프란시스처럼 한 뼘쯤 성장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프란시스 하’와 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의 이름이 철자가 빠진 온전한 이름이 아니듯 내 이름 ‘하완’ 역시 본명에서 한 글자가 빠진 이름이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