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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훈 Aceit Jul 17. 2021

다시 한번 인생을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길

내 기억 속의 어머니


한국인 치고는 독특하게 연한 갈색 눈,  그리고 웃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2021년 6월 어느 날 병원에서 운명하셨다.


어머니에게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다: "천사"와 "여장부".

어떻게 이 두 개의 상반된 느낌의 별명이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눈을 감고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길을 돌이켜보면 두 모습의 어머니가 눈에 선히 보인다.


나는 살아오며 어머니보다 착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오히려 어머니의 순한 모습이 답답해 보였기에 나는 반대로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선의를 갖고 대했을 때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보면서 가족으로써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생각에 일부러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어머니는 무엇을 함에 있어서 항상 자신감이 있고 운동신경이 좋으셨다.  학창시절에는 TV에서 어머니가 아마추어 볼링대회에서 이기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으며,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처음에 그렇게 싫어하시던 골프도 막상 시작하신 후에는 금새 수준급으로 올라가셨다.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 분명히 bias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어머니를 알던 분들을 만나 다시 인사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가 절대 편향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인생은  사람이 세상을 떠날    있다고 했다던가?

어머니의 장례를 찾아온 사람들은 단순히 예의를 갖추기 위해 방문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오열하고, 너무 울다가 쓰러지고, 쓰러진 후에도 긴 시간을 그 자리에 앉아 슬퍼하셨다.

내가 봐왔던 어머니와 남들이 생각하는 어머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음,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 이별


그렇게 착하고 강했던 어머니었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평등하게 찾아왔다.

발병하신 후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고, 말기에 가서는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임종에 가까워지셨을 때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있는 그 순간 그리고 그 감촉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마지막 어머니를 보내드리기 직전 병실에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프셨을 때에는 건강하셨을 때가 그립고, 거동이 어려워지였을 때에는 아파도 움직이시던 때가 그리우며, 누워계실 때에는 그래도 눈을 마주칠 수 있었던 때가 그립구나.  이제 돌아가시면 지금 잡고있는 힘 없는 어머니의 손, 눈을 감고 계시지만 그래도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리워지겠지.  그리고 장례를 치르면 그나마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그 시간이 그립겠지."


마지막에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두 가지만 전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바보같지만 마지막에는 저 두 마디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까지 전하고 싶었고, 내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이후 사무치게 슬프고, 혼미했던 시간으로 가득한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회사 이메일함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일이 쌓여있었다.  시급한 일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며 잠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무언가 현실과 비현실이 햇갈리는 기분을 느꼈다.

똑같은 컴퓨터를 열고 똑같은 일을 하는 것 보면 나는 여전히 현실을 살고 있고, 현실에는 당연히 어머니가 계셔야하는데 지금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님은 늘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나? 그런 어머니가 안계신다니.

어머니의 죽음은 그 동안 경험했던 그 누구의 죽음과도 다르게 느껴졌다.

예를들면...  넓고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사는 것은 아니겠지 라는 논리적인 추론을 하면서도 막상 외계인을 만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다가어느날 갑자기 외계인을 만난  같은?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여지면서도 그래도 설마 라는 생각이 드는...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그 시간이 금새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머니의 장례식은 분명 내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끔 생각하게 해 주었다.

나는 매우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늘 그렇게 살아왔다.  항상 목표가 있었고 그것들을 이루기위해 다른 곳에도 쓸 수 있었던 내 시간들을 희생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례식은 나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목표를 이루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까?

목표를 이루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좋을까?


나에게 목표가 없다면 나는 매주 가족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러 놀러갈 것이다.  

퇴근을 최대한 빨리하고 그 이후에 개인적인 즐거움을 갖는데 시간을 쓰려고 할 것이며, 주말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주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에게 목표가 없다면 나는 사람들과 다툴 일도 없고 불편한 관계를 가질 일도 없을 것이다.

회사의 실적이 나빠져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야기하고, 더 극단적으로는 모든 것을 남에게 맡기고 직원들 밥만 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솔직하게 내 삶은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시간들로 가득차있다.

주말에도 컴퓨터를 들고 회사로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1년의 절반은 된다.

회사에서도 단기적 목표, 그리고 장기적 목표까지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고 프로젝트들을 만든다.  그리고 잔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뒤에서 하는 욕과 불만을 또 그대로 듣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몸이 상하면서도 또 목표를 위해서 잔소리를 하게 되거나 추가적인 일을 하게 된다.


이러다가 세상을 떠나면 내 장례식은 참 외로울 것 같다.

분명히 어머니의 장례식처럼 오열하고 쓰러지는 사람 보다는 예의로 찾아오는 사람의 비중이 더 클 것 같다.


어떤 삶이 더 옳은 것인가?


무엇이 옳은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는가?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항상" 같을 것인가?


2021-07-17.

어머니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전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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