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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비 May 13. 2020

청춘의 재정의

기타노 다케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리뷰

사람들은 영화를 꽤 좋아한다. 그래서 극장 인기 영화는 대부분 챙겨 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 나름의 흥행 조건들이 있다. 화려한 비주얼이나 CG, 생생한 사운드, 복잡하지만 재미있는 플롯 등이 그렇다. 100여분 동안 눈과 귀, 그리고 머리를 즐겁게 해줘야 흥행영화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흥행조건을 따르진 않는다. 나름의 기획의도를 가지고선 감독과 연출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영화들도 있다. 내가 오늘 본 영화가 그랬다. 바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91년작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다. 영화는 젊은 청춘 남녀를 주인공으로 한다. 영화의 배경은 바다다. 청춘과 바다라는 키워드는 말만 들어도 역동적이고 시끄럽다. 하지만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잔잔하고 조용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은 영화의 두 주인공이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청각장애인인 시게루가 버려진 서핑보드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시게루는 갑자기 서핑에 매료되어 돈을 모아 서핑보드를 산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서핑을 하기 위해서 바다에 뛰어든다. 그리고 혼자 연습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의 여자친구는 묵묵히 지켜봐준다. 들리지 않는 세상 속에서 서핑은 그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세계였을 것이다. 그는 비오는 궂은 날씨에도 서핑 연습을 하러 바다에 나간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영화에선 화면이나 사운드로 재미를 찾아볼 일이 거의 없다.  카메라 구도는 거의 멈춰있다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적으며 대사는 영화 전체의 20%를 차지할까말까 할 정도로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플롯도 잔잔하기 마찬가지다. 시게루가 죽는다는 슬픈 결말이 있긴 하지만 엄청난 위기나 반전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흥행조건을 갖추진 않았지만 아름다움은 간직한 영화다. 잔잔한 영상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이나 신체적 제약을 뛰어넘는 청춘의 도전, 언어 없이 이뤄지는 사랑의 모습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의 최고 백미는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단 3분의 모습이다.


마지막 3분 동안에는 영화에 출연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집단들이 나온다. 시게루에게 보드 값을 바가지 씌웠지만 서핑에 도움을 준 서핑용품점 사장님, 외롭게 혼자 연습하던 시게루에게 친구가 되어준 서핑동호회원들, 시게루를 놀려댔지만 시게루를 따라 서핑에 도전하는 어리버리한 동네 친구들, 그리고 시게루와 그의 여자친구. 이들은 각각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듯이 나란히 서 있는다. 그리고 그 모습이 스틸식으로 이어져 나온다. 화면이나 소리가 특별해진 것도 아닌데 이 3분만큼은 가장 활기가 느껴지며 찬란하기까지 하다.


이 3분에는 바다를 품는 것이 꿈인 사람들의 열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중심으로 모여 서로 연대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게루를 묵묵히 바라보고 따라주는 그의 여자친구의 순수한 사랑이 담겨 있다. 어쩌면 같은 젊음이지만 지금 청년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 청년들은 꿈, 사랑, 연대를 사치처럼 느끼곤 한다. 꿈보단 당장 현실적인 것조차 이루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랑과 연대는 자연스럽게 사치가 되어버린다. 이 영화의 3분은 우리가 늘 쫓고 싶었던 청춘의 모습과 같았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어 보인다.


마지막 3분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보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즐길 것도 볼 것도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이 영화는 선택받기 어려워 보인다. 이 3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지루함과 답답함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밋밋한 화면, 들리지 않는 소리, 답답한 소통 그리고 바보 같은 사랑의 모습까지. 하지만 어쩐지 점점 빠르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 익숙해질수록 이 3분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것 같다. 그건 아마 나 역시 온전한 청춘의 모습을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리움 때문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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