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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비 Apr 09. 2020

퍽퍽한 밥벌이는 그만

일본드라마 <중쇄를 찍자> 리뷰

왓챠플레이에서 '중쇄를 찍자'를 시청할 수 있다.

나는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을 통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도전욕구를 일으켜준다. 이런 드라마를 보고나면 무료했던 삶에 활력과 의지가 생긴다. 그러나 신입사원이 주인공이라면 약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온갖 역경이 불러낼 짠내를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달랐다. 바로 일본드라마 <중쇄를 찍자>이다. 주인공인 ‘쿠로사와 코코로’는 전직 유도선수다. 유도를 잘 하던 그녀는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그녀는 만화를 좋아한다는 열정으로 한 출판사의 주간 만화잡지 편집부에 입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입사원답게 의욕은 최고치이지만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한다. 그래서 우선은 그동안 발간한 만화책들을 전부 읽는다. 그리곤 각 만화들의 화풍, 스토리, 재미요소, 감동요소와 같은 중요한 것들을 전부 파악한다. 신입사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프로 편집자들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체득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에겐 본격적으로 담당할 만화가 생긴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어려움에 직면한다. 낙서인지 만화인지 모를 콘티를 읽어낼 수가 없다. 그녀는 문제해결을 위해 만화가의 지난 만화를 참조해가며 콘티 읽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이번엔 만화가가 실연에 빠져 다음 주 원고를 대충 쓴 채 내놓는다. 그녀는 만화가의 작업실로 직접 찾아간다. 그리고선 제대로 원고를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지시한다. 신입이라고 절대 기죽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만화가에게서 완성도 높은 만화를 끌어낸다. 그녀는 점점 편집자라는 직업에 한발 짝 다가간다.


그녀는 회사 밖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열심을 쏟는다. 하다못해 휴무기간에 도움을 요청한 신인작가에게도 곧바로 달려가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요즘 트렌드인 ‘워라밸’을 생각해보면 코코로는 참 균형도 못 잡는다. 그런데도 코코로는 마냥 밝고 행복하다. 직업 만족도가 높아서일까. 아니, 그보다 그녀는 매순간 그저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자신의 힘을 필요한 곳에 쏟고, 타인을 존경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에겐 일은 삶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은 삶의 한 영역이며, 그저 소신대로 삶을 살아갔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워라밸이 말하는 라이프의 영역이 참 모호한 것 같다. 이것은 보통 자신을 위한 모든 시간의 총합을 말한다. 좋아하는 여가 활동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혹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정확히 일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나만의 삶을 사는데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때로는 누군가의 배우자로써, 부모로써, 친구로써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도 한다. 1인가구라면 수행해야 할 역할이 비교적 적겠지만 어쨌든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일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라밸(배우자와 라이프의 밸런스), 부라밸(부모와 라이프의 밸런스)와 같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할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삶에서 따로 분리된 영역이 아닌 삶의 한 부분인 것이다. 마치 코코로의 삶처럼 말이다.


워라밸은 어쩌면 소신껏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는 소신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탓하고 일은 밥벌이로써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무력감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적당히’ 일하고 싶은데 그것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한 단어가 워라밸같다. 물론 일자리 부족, 짧은 정년과 같은 문제가 있는 지금의 사회에선 개인의 소신대로만 살기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개인의 좌우명과 소신이 계속 사라진다면 밥벌이가 점점 더 퍽퍽해질지도 모른다. 워라밸이 만연한 요즘,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 보다 삶에 어떤 소신을 담을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퍽퍽한 밥벌이를 그만하고 싶다면 균형보다는 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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