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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어 Mar 13. 2024

오늘으 ㅣ 일ㄱ ㅣ,,

2022 <사소한 고백>


8:14 am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깼다. 요즘은 이런 날이 잦다. 배가 살짝 고프지만 침대에서 몸을 떼지는 않는다. 일찍 깬 게 억울해서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베개에 머리를 데고 빨간색 버튼을 눌러 2000개쯤 쌓인 ‘나중에 볼 동영상’ 목록을 훑어본다. 가장 의미 없고 실없이 웃을 수 있는 영상을 눌러 실없이 웃다 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싱크대에는 전날 무엇이 담겼는지 모를 작은 냄비가 더럽혀진 그릇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다. 세제를 묻히지 않은 수세미를 물에 적셔 한 두 번 휘휘 저어 흐르는 물에 씻어준다. 그렇게 씻어낸 냄비에 물과 함께 수프를 넣어준다. 유튜브를 보면 요즘에는 물이 끓기 전에 면을 같이 넣기도 하던데, 한번 시도해볼까 싶다가도 아무래도 의심을 떨치기가 힘들어서 그만둔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아침 명상 영상을 틀어놓는다. 삶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이야기해주는 이 음성 없이는 왠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만 같다. 수프를 넣은 물이 끓어오르면 면을 넣고, 면이 익기 시작하면 젓가락으로 저어준다. 계란은 넣지 않아도 파는 꼭 송송 썰어 넣어준다. 냉장고에 콩나물이 있어서 같이 넣어주었다. 비좁은 집안에 알싸한 라면 냄새가 가득 퍼졌다.


10:34 am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 중에 가장 힙해보이는 라면을 골라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소확행 #평일아점

알고리즘이 올림픽 이후로 뜬 곽윤기 선수의 과거 예능 출연 영상을 상단에 띄워주었다. 눌러서 잠깐 보다가 밥 먹을 때는 아무래도 조용한 영상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배우 김새론의 먹방 영상을 재생했다. 건강한 재료로 그럴듯한 요리를 해 먹는 어린 배우의 모습을 보니 콩나물 넣은 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11:45 am

밥을 다 먹고 잠깐 누워 소화시키다보니 어느새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욕실에 가서 양치하면서 화장을 하고 나갈지 선크림만 바르고 나갈지를 고민해본다. 초록색 니트를 입으면 좋을지 하늘색 니트를 입으면 좋을지 고민해보았다. 날씨가 맑으니 초록색 니트에 화장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결론과 함께 욕실에서 나와 스킨과 로션, 선크림을 꼼꼼히 두드려서 발라주었다.


12:32 pm

운전석에 앉아서 블루투스 연결을 했다. 듣고 싶은 음악이 딱히 없어서 ‘랜덤 재생’ 버튼을 눌러주었다. 운전하며 창밖을 보니 맑은 줄 알았던 날씨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단 걸 알게 되었다. 미세 먼지로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저녁으로는 삼겹살을 먹어야 하나. 아직 라면이 다 소화되지 않아서인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12:59 pm

매번 주차하던 공간에 주차하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악기 꺼내고 수업 시작하자’ 란 말을 세 번쯤 하면 어기적어기적 악기를 꺼내온다. 지난 수업 후에 처음으로 바깥에 나온 악기를 꺼내오면 뻑뻑한 팩을 돌려가며 음정을 맞춰준다. 검정 파일 속에는 3년째 매 수업 때마다 듣고 있는 ‘캐리비안의 해적’과 ‘인생의 회전목마’ 악보가 담겨 있다.


“미는 레줄에서 1번인데 플랫이 있으니까 손가락을 밑으로 내려야 해~”


역시나 3년째 계속되는 단골 멘트 중 하나이다.


15:01 pm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다른 교실로 장소를 옮겼지만 들려오는 음악에는 변화가 없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인생의 회전목마... 레솔시 레레 도시라 시.. 시에는 플랫이 있으니 라줄에서 1번인데 손가락을 밑으로 내려주어야 한단다.


16:55 pm

피곤하고 배고픈 나와 학생들을 위해 수업을 5분 일찍 끝냈다. 집에 가서 맥주와 함께 먹을 안주를 고민하면서 핸들을 잡았다. 라면은 낮에 먹었으니 저녁은 밥을 제대로 먹는 게 낫기는 할 텐데. 치킨이 좋을까? 햄버거를 사갈까? 냉장고에 양배추가 있으니까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볼까?


17:46 pm

불고기버거 세트를 포장해서 어느새 어두워진 집에 들어섰다. 노트북 앞에 먹기 좋게 세팅하고 넷플릭스를 골라본다. 의미 없이 웃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냉장고에서 4캔에 만 원 하는 캔맥주 중에 두 번째 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먹을 거였으면 콜라를 주문하지 않아도 됐었겠단 생각이 스쳤다.


19:55 pm

누워서 넷플릭스를 본다는 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맥주가 주는 취기와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차 무거워진 배를 일으켰다. 잠깐 걸어야겠다. 에어팟을 끼고 ‘산책할 때 들으면 좋은 노래 best 20’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산책로에 나가보았다. 한참을 걸어도 기분 나쁜 더부룩함이 완전히 사라지기에는 부족하다. 이어폰 속에서는 잔잔한 인디 밴드의 음악이 들려오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낮 동안 계속 들은, 그리고 내일 또다시 듣게 될 캐리비안의 해적이 들려온다. 파미레 도레미 파솔라 시라솔 파솔라 시도 도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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