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글쓰기
https://www.youtube.com/watch?v=5rAdPq0wouQ
행복은 꿈에 불과하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별 있는 사람은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라고 말했다. 이 명제의 진실은 모든 쾌락과 행복은 소극적인 성질을 띠는 반면,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띤다는 데 있다. 몸 어디에 작은 상처만 있어도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은 의식되지 않고, 그 상처의 통증에만 온 신경이 쓰여 유쾌한 기분을 가질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뜻대로 진행되더라도 한 가지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계속 그 일만 생각하며 뜻대로 진행되는 다른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가 가르치는 것은, 삶의 쾌락이나 안락에 주목하지 말고 오히려 수많은 재앙을 피하려 노력하라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글을 쓰는 나와 읽는 당신 모두) 그 바람에 휩쓸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외부 조건이 녹록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수록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꿈을 그리며, 그 꿈에 자신을 투영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필터'는 그 꿈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강력한 효과를 지닌 필터일지도 모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남의 머리 위에 서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이 지닌 야심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결국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는 '노예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반대로 해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을 딱히 원하지 않는 것 같던 사마의에게 관직에서 지속적으로 올라가 일을 한다는 것 - 그것도 당대 사회 분위기상 관직에 나오지 않은 채 명사가 되면 잠재적인 역적 취급을 받던 분위기 속에서 - 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삶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는 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유리한 환경으로 바뀌기까지 기나긴 세월을 참고 견디고 또다시 참고 견디는 삶을 반복했다.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굳이 원하지 않았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과연 자신의 삶이 행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