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글쓰기
당신은 매일 아침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다짐하는 글을 쓸 때마다 다음의 한 가지를 쓴다.
"힘든 일은 말이 아닌 글로 풀어낼 것."
그렇기에 당신이 무언가를 쓰는 순간은, 내면의 혼돈과 앞날에 대한 불안이 가득한 바다를 마주하고 어찌할 줄을 모를 때이다.
때로 당신이 마주하는 내면의 모습은 고독과 우울함으로 가득하다. 어딘가에 이야기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그저 밀려드는 불안감과 잘 다듬어 보관 중이던 우울함이 치고 들어와 당신을 괴롭힌다. 분명, 객관적으로 당신은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외부의 상황은 늘 당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당신은 때로는 저열하고 수준 낮은 행동을 하는 주변에 대하여 한숨을 쉰다. 그러다 문득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스쳐가는 여러 가지 단어 중 한 가지 단어가 당신을 자극한다 - "순례자"
당신은 사전을 켜고, 단어의 뜻을 찾아본다.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종교적인 목적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아니다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당신은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마음속에도 자신만의 '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그저 끝없는 모험을 하는 그러나 지금은 지친 '모험자'에 가깝다고 스스로를 정의해 본다 그리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적절한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다음의 문장을 찾는다.
"Per ardua ad astra"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당신은 너무 거창한 표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것이 현 상태에 대한 적절한 표현일까에 대하여 고민한다. 아니다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스스로의 내면으로 들어가 무엇이 당신을 갑작스러운 불안 상태와 고독감에 잠기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그리고 차분히 살펴본다.
차분히 살펴보고 또 살펴본다. 내면에 자리한 무엇인가를 두드려보고, 만져보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지닌 오감을 총 동원해 내면의 그 무엇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당신은 마침내 내면의 그 무엇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찾는다. 그리고 차분히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진정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따라 걷던 당신은 차분히 그 길을 둘러본다. 목적지가 있다고 표지판은 있지만 표지판에 쓰인 목적지는 이 길 그 자체다. 곧 당신은 이 길이, 마음속의 여정이 당신이 영원히 걸어야 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여정에 놓인 마일스톤들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최소 50년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은 영원히 내면의 혼돈을 다스리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말이죠"
마침내 당신은 과거 인상 깊이 보았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의 포스터 속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은 것 같다.
"우리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 묵묵히, 차분히 그리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잠시 비를 피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관계에서든 피할 곳이 없다면, 당신 마음속의 오솔길을 하나 만들고 그 오솔길을 계속 걷는 와중에 하나의 오두막을 지어보도록 해보기로 한다. 어떤 이들은 마음속 궁전을 만든다고 하지만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든 뭐든) 당신은 내면의 평화를 위한 해결책으로 거창한 궁전은 아니더라도, 차분히 쉴 수 있는 오두막을 떠올려본다.
이제 어느 정도 내면의 안식을 찾은 기분이다. 당신을 따라온 고독과 불안감도, 이제 목소리를 죽이고 오두막에서 잠시 쉬기로 한다. 오두막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서 당신은 한 장의 메모를 발견한다.
"... 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정해진 일을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기 위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해주소서라는 기도/시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러한 연상에서 나온 당신 마음속의 메모일 것이다. 당신은 이제 차분히 내면의 혼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