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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May 10. 2020

내 인생의 쉼표,  나로 사는 즐거운 선물

나의 시작, 나의 도전

      

수업 시간 틈틈이 대학생이 되면 한 번쯤 배낭여행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나에게도 ‘인생의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여행가의 꿈을 가진 내게 50살이 되면 세계여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남편은 너무 일찍 세상과 이별했고, 내 꿈은 멀어져 갔다. 고3 담임을 연이어 맡으며 몸이 지쳤다. 일에 파묻혀 사는 내 삶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세계여행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꿈틀거렸다. 마침 일생에 딱 한 번 이용할 수 있는 휴직제도가 학교에 도입되었다. 무급이어서 문제였지만,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6개월의 세계여행에 도전하기로 했다.     


무급휴직과 여행은 생각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의 동의도 구해야 했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컸다. 여행경비 외에 예비자금도 필요했다. 다른 지방에서 대학에 다니는 딸아이의 학비와 생활비, 아파트 관리비, 공과금, 부모님의 용돈 등을 준비해야 했다.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의료보험료, 연금, 보험금 납부는 유예했다. 자동차 보험은 기본 보험으로 전환하고, 휴대전화는 일시 중지했다. 그러고도 돈은 모자랐다. 용기를 내어 ‘살아 숨 쉬는 그녀의 여행 펀드’를 만들었다. 소셜 펀딩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후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내 꿈에 투자해줘. 일 년 뒤 원금은 고스란히 돌려받을 테고, 나의 멋진 여행 이야기를 이익금으로 선물할게. 무엇보다 너의 꿈도 동시에 응원하는 거야.”     


어렸을 때,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이면 동네 할머니들이 찾아와서 꾸깃꾸깃 접어두었던 쌈짓돈을 끌러 용돈으로 주시곤 했다. 궁한 형편에도 도움을 주려고 했던 할머니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용기 낸 펀딩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고스란히 돌려줘야 할 돈이었지만, 나를 후원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여행 중에 힘이 될 것도 같았다.      


“너의 여행 펀드 들고 싶어. 네 도전에 나도 시작할 용기를 얻었어.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 있는데, 해보려고. 날 위해서라도 여행 잘 다녀와.”     


가족, 친구, 동료들이 펀드에 가입했다. 영양제, 화장품, 밥 한 끼로도 응원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경제적인 후원만이 아니라 든든한 믿음도 함께 주었다.      


영어 공부도 해야 했다. 혼자만의 여행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도 없었다.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려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집 근처 부산대학교 국제언어교육원에서 영어회화수업을 수강했다.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수업이라 두렵기도 했지만, 매일 퇴근 후에 부산대학교를 찾아갔다.      


“나도 대학교 새내기가 되고 싶고, 내 전공을 말하고 싶은데, 나는 이미 오래전에 졸업했어. 내가 이 수업을 듣는 이유는…‥.”     


50이 넘은 나이만으로도 주눅이 들었지만,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업을 녹음해서 틈날 때마다 들었다. 친구가 선물해준 수강권으로 화상 영어 수업에도 도전했다. 불가리아에 있는 ‘라디’ 선생님과의 수업이었다. 서툰 영어로 하는 온라인 수업이라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었다. 어느덧 장거리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수업을 기다렸다. 여행 중에 라디를 만나러 가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고, 그 꿈을 이루었다. 영어 공부는 젊은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주어 여행 내내 20대부터 80대까지 세계 곳곳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돈이 모이고, 영어가 늘고, 떠날 날이 다가오자 6개월 동안 비워둘 집이 걱정되었다. 냉장고와 냉동고에 가득 찬 식료품, 베란다와 집안에서 키우는 식물, 집을 비울 동안 쌓일 우편물을 해결해야 했다. 예전에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집을 채우는 일로 바빴다. 집에 남은 가족이 불편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준비해야 했다. 이제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집을 비우는 일로 바빴다. 가까이 사는 친구와 이웃에게 식자재를 나누어 주었다. 식물도 분양했다. 아파트 정원에 옮겨심고, 식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이웃집에 나누어 주었다. 우편물은 앞집 아주머니가 관리해주기로 했다. 집을 정리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의외로 간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내 인생을 정리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나는 떠났다. 처음으로 하는 혼자만의 여행이라 출발 전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나도 몰랐던 자신감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실크로드, 파미르고원, 코카서스, 중동, 아프리카에까지 발을 디뎠다. 두려움보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더 컸다. 여행에서 나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오롯한 내 이름, ‘진’으로 섰다. 여행 끝자락에 신용카드가 모두 정지되어서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50대의 내 도전은 나로 살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부산대학교에 유학 중인 20대 친구와 공유가족을 이루었다. 여행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가 부산으로 여행 왔을 때는 내가 근무 중인 학교로 초대해 학생들과 토론회도 가졌다. 여전히 세계 곳곳의 친구들은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전해오고, 나는 또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진, 저녁 같이 먹을래요?”     


퇴근 무렵에 공유가족인 지아가 메시지를 보내온다. 내 인생의 쉼표로 얻은, ‘진’으로 불리는 즐거운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오쉬. 현지인 친구 집에 초대받은 날
타지키스탄. 무르갑. 생애 처음으로 여행 친구들과 4750m에 오른 날
요르단. 페트라.  네 자매가 운영하는 찻집에서


조지아. 카즈베기.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한  트래킹
불가리아. 스트라자고라. 나의 영어교사였던 라디와 그녀의 친구들
이스라엘. 헤브룬.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지역자치위원회 앞.
레바논. 베이루트.레바논 전통 요리를 소개해주던 에어비앤비 주인장
나미비아. 짐바브웨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함께 여행한 친구들
우리 집에서 두 번째 생일을 맞은 지아를 축하한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UttVF9coSBM&t=15s

부산. 금정산. 외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영상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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