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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Feb 10. 2021

책 한 권으로 시작하는 하루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책 한 권으로 시작하는 하루. 『아침의 피아노』(김진영, 한겨레출판)를 읽는다. 

 

“이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라는 문장이 가슴에 꽂힌다.      


철학자 김진영(1952∼2018)의 애도 일기 속 한 구절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는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고, 13개월 동안 환자로서 겪은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해서 애도일기를 남겼다. 책을 펴면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라는 문구를 처음 만난다.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시간들. 그러면서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내게 찾아온 오늘 아침을 능동적으로 사랑하고 환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행간에 담김 그의 ‘시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가 말했듯 우리 모두 두 세계의 시간을 마음에 두고 있다. 내가 있는 세상과 내가 사라진 후의 세상.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으며 매일 아침을 맞았던 그처럼, 나는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오늘 아침을 맞는다.           




P17 내가 존경했던 이들의 생몰 기록을 들추어 본다. 그들이 거의 모두 지금은 나만큼 살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S 생각이 맞았다. 나는 살 만큼 생을 누린 것이다.      


P23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P61 긴 세월 타지에서 성실한 삶을 배운 뒤에 어느 날 문득 그곳이 타향임을 발견하고 고향을 기억하는 마음 같다고나 할까, 타향의 삶을 고향처럼 살았던 사람만이 귀향의 꿈과도 만나는 건지 모른다. 하기야 그러함은 지적인 삶만이 아니라 생 자체의 순리이기도 할 것이다. 한 생을 세상에서 산다는 건 타향을 고향처럼 사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우리는 문득 거기가 타향임을 깨닫고 귀향의 꿈과 해후하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과연 내가 한 생이라는 타향의 삶을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는지 그것이 내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P67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P77 TV를 본다. 모두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P81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      


P103 지금 살아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P112 문득 차라투스트라의 한 문장: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는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 – 그건 또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P119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P121 나의 나쁜 습관 중에는 오래된 결정주의도 있다. 모든 일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습관.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에 나는, 삶의 다반사들이 일어나고 진행되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예외와 우연의 사건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삶 속에 그렇게 미리 결정되고 예정적인 것은 없다. 길은 언제나 곡선이다. 그것이 생 스스로 가는 길이다.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결정주의라는 선취된 오류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오류의 자리에 희망을 앉혀야 한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발생한다. 이 희망의 진실에 대한 확신이 지금 내게 절실한 기억이다. 그러니 희망을 노래하자. 비타 노바.      

P182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P199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P204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만이 나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이다.      


P212 응어리는 이미 둔 바둑판처럼 남겨두기로 하죠.     

 

P231 다시 푸르스트: “우리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드리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    

  

P242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P243 내가 사랑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더 많이..... 이것만이 사실이다.      


P251 몸무게를 달아본다. 자꾸 마른다. 자꾸 가벼워진다. 나중에 나는 날아오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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