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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연 Sep 07. 2023

[장애도] ② 가해자의 엄마

책상을 붙여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다

고작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아들의 공격행동으로 심장이 덜컹한 상황이 두 번이나 발생했다.      

아들은 크고 있었다.


이제 갓 10대에 들어섰을 뿐이지만 눈 깜박하면 중학생이 되고, 한 번 더 깜박하면 고등학생이 될 것이었다. (진짜로 눈 한 번 깜박했을 뿐인데 지금 아들은 중학생이다)

무언가 바뀌지 않으면, 앞으로 키도 커지고 힘도 세질 일만 남은 아들은 정말 ‘괴물’로 자라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더는 안 돼!”

나는 맘 먹은 상태.

‘단호한 결의’를 다지며 학부모 상담(IEP, 개별화교육 회의)을 위해 학교로 향했다.      


똑똑똑.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교실로 들어가는데 책상 배치가 눈에 들어왔다.

5개 책상이 나란히 붙어있고 1개 책상이 거리를 두고 따로 떨어져 있었다.


“선생님. 저 자리가 동환이 자리인가요?”     


혼자 떨어져 앉은 아들 자리를 본 순간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키워드.

△20년 뒤 △뉴스 △사회면 △안타까운 소식 △한강

안 돼. 나도 살고 동환이도 살려야겠다.      


쫄지마. 마음을 굳게 먹자.

주먹을 꼭 쥐고 다짐했던 ‘단호한 결의’를 실천할 시간이다.      


개별화교육 회의     


“선생님, 학습적인 부분은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엄마인 나는 아들의 학습 수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장애인 딸의 학습 수준에 대해선 ‘과목별’로 아주 잘 알고 있다.      


학습도 인지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받쳐줘야 가능한 일.

자폐와 중증의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은 학습이라 할 만한 ‘어떤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생활도 아들 수준에 맞는 작업 활동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특수교사가 누구던가.

교육 전문가다. 특수교육 전문가.  

엄마인 내가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지 않아도 수업 몇 번 진행해보면 아들에 대한 각이 척~ 하고 나올 터.

학습적인 부분에 대해선 특수교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겠다고 했다.       


대신 나는 다른 것을 부탁한다고 했다.  

바로 아들의 사회성 부분.

이대로 성장해 어느 순간 정말 감당 못 할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선생님.

올해 제가 생각하는 개별화교육 회의 목표는 바로 사회성 발달, 이것 하나입니다.       


나는 담임에게 아들의 문제행동이 극대화된 이유는 ‘관계에서의 고립’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살이’에선 사람들 간에 갈등 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아들은 갈등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공격행동을 하는 것으로 ‘순간 대응’만 해 왔다.

그런 순간들이 누적돼 학교 안에서 유명한 괴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토록 예쁜 짓만 하는 아들이 학교에만 가면 괴물이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아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조차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다면 배워야지. 더 커버리기 전에, 아무도 감당 못 하게 되기 전에.      


책상을 붙여앉게 해달라고 했다.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모든 관계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게 하고, 관계 안에서 그 갈등을 풀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담임은 곤혹스러워했다.

'아들의 엄마'인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른 학생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학기 초부터 자신의 자녀가 내 아들한테 맞기라도 하면 다른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겠냐고도 했다. 

      

그랬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수업이나 산더미같은 행정이 아니었다.

언제나 학부모 민원이 가장 힘들다.

학부모 민원에서 자유로울 교사는 없었다.      


친구들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었다.

아들이 아니더라도 어울릴 친구는 많았던 데다 괜히 아들과 어울렸다 휘두른 팔에 한 대 맞거나 할큄이라도 당하면 어쩔 것인가.

다른 학부모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 반 엄마들의 동의를 받아오면 되는 거죠? 그러면 아들도 책상 붙여서 함께 공부하게 해주실 거죠?”     


담임이 한숨을 쉬었다.

학기 초는 적응 기간이니까 조금 떨어져 앉았다가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면 천천히 책상을 붙여 가 보자는 담임과, 새 학년에서도 ‘고립’이 공고해지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니 처음부터 고립되지 않는 환경에서 적응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가 팽팽히 맞섰다.      


책상을 붙여 앉을 것이냐 떨어져 앉을 것이냐.

상담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고 이 문제에 결론을 내기 위해 그 후로도 3번 정도 더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반에 6     


문제행동 있는 학생의 자리를 분리해서 다른 학생들과 떨어트려 놓는 것.

요즘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생활지도 부분에서 ‘문제 상황 발생 시 즉각 분리’와 어떤 면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어떤 면에서는 결이 다를 수 있다.

결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이곳이 특수학교이기 때문이다.      


특수학교는, 특수학교라는 그 시스템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장애 학생들만 모인 공간 안에서 또 다른 고립과 배제가 일어나곤 한다.       


특수학교 교실 안의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특수학교 교실 안에선 6명의 발달장애인이 등교부터 하교까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일반학교 특수학급은 한 시간에 2~3명 학생이 특수반에 가서 수업을 듣지만, 특수학교에선 특수교사 혼자 하루 종일 6명을 동시에 교육한다.     


반 구성원을 보자.

아직 말도 못 하고 화장실도 혼자 못 가는 학생부터 외국 팝송을 듣고 교과서가 시시할 정도로 인지 발달이 좋은 학생까지, 동급생 간 발달 격차가 심할 땐 10여년에 이르기도 한다.        


특수학교에선 이런 이들이 한 교실 안에 모여 동시다발적으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특수교사는 혼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하고 건사하며 수업까지 진행해야 한다.      


누군가는 수업 종이 쳤는데도 창문 앞에 서서 바깥 경치만 바라보고 있다.

그때 말 잘하는 누군가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앞자리 앉은 친구를 놀리고 있다.

놀림을 받은 친구는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자기변호력 없는 이 친구는 “우왕~”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친구가 놀렸다는 것을 알리지만 알아채는 사람은 없다.

그때 청각 자극에 예민한 누군가가 친구의 울음소리를 참을 수 없어 그만 울라는 뜻으로 팔을 뻗어 그 친구를 때리려 한다.

교실 안이 소란해진 틈을 타 누군가가 교실 탈출을 시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교실 안의 상황이 어쩌거나 말거나 그냥 조용히 칠판만 쳐다보고 있다.      


교사는 1명, 학생은 6명.

교사는 6명 학생을 달래고 어르고 주의시키고 혼내며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애쓴다.

실무사 또는 사회복무요원이 교사 지시에 따라 학생 지도를 돕지만 이들의 역할은 ‘보조’를 넘지 않는다.

이런 일상이 아침에 등교해서 오후에 하교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는 6명 학생들에게 매 수업마다 한 가지 주제로 저마다 다른 학습을 시킬 것을 요구받는다. 특수교육의 핵심이 개별화교육이기 때문이다.      

(특수학교 개별화회의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자. 이런 상황에서 반에 공격행동 있는 학생까지 있다.

어쩌면 좋을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배려를 가장한 배제     


그동안 아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특수교육보조인력이 공격행동 있는 아들을 전담마크 했다.

(순간적 공격행동을 얼른 막기 위해 보조인력이 늘 아들 곁에 붙어 밀착마크 했다)     


아들이 어릴 땐 그런 상황이 마냥 좋았다.

아들이 어른 한 명에게 특별 돌봄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뀐 건 성인 발달장애인 삶에 대한 취재를 하고 나서부터다.

성인기 삶에서 중요한 건 기능의 높고 낮음보다 사회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들의 사회성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사회성 측면에서 아들이 사는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아들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아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마 학교에 있는 동안 아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등교하는 순간부터 아들 옆에는 늘 공익형이 있다.

아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공익형뿐이다.


수업 중에도 담임은 제시하고 리드할 뿐 구체적 작업 활동은 공익형이랑 하고, 화장실도 공익형이랑 가고, 현장학습을 나가도 공익형과 짝이 된다.       


아들이 교실 안에서 공익형과 ‘단둘의 세상’에 갇혀 있는 동안

반 친구들은 선생님과 공부하고, 선생님이랑 화장실 가고, 선생님 손을 잡고 현장학습을 다닌다.

수업 중에도 자신을 뺀 나머지 친구들은 나란히 책상을 붙여 앉아 수업도 같이 하고 놀이도 같이 하는데 아들은 그곳에 낄 수 없다.


아들 책상은 한 칸 떨어져 있고 친구들과 아들 사이는 공익형이 가로막고 있다.       


공익형이 아들 전담으로 1년을 보냈던 해, 담임은 이런 말을 했다.

공익형이 휴가나 조퇴, 교육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은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들의 문제행동(공격행동)이 더 심해졌다고.      


어떤 상황일지 감이 잡혔다.


혹시 나만 배제된 것 같은 모임에 가 본 적 있는가?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모임 말이다.

또는 자기들끼리 이미 친해서 그 자리에 내가 끼는 것 자체가 가시방석인 그런 모임.

생각만으로도 불편하고 싫지만 안 갈 수 없는 모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일지 선택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며 조용히 있다 나오거나,

오히려 더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로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아마 나라면 두 번째 태도를 택할 것 같다.      

모두가 나를 배제한다고 느낄 때 일부러 다가가서

“여~ 오랜만이네. 다들 잘 지내지?”라며 존재감을 뿜뿜하는 것이다.

‘흥~ 니들이 나를 따돌리는 중이야? 그래. 얼마든지 그래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니 아마 아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마음이더라도 사회화가 잘 되고 유창한 언어를 사용해 대응하는 엄마와 달리

말 못하는 아들은 삐진 마음, 화난 마음, 친해지고 싶은 “왜 나를 껴주지 않아”라는 마음을 공격행동으로 드러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 더 나가볼까.

나 빼고 자기들끼리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모임에 매일 나간다.

그나마 그 모임을 버틸 수 있는 건 나랑 친한 누군가가 1명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한 명에 의지하면서 불편한 모임을 버티고 견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한 명이 조퇴를 해버리고 결석을 해 버린다.

그러면 그 불편한 모임의 분위기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한다.

불안도가 쭈욱 올라가고 신경은 예민하게 바짝 날이 설 것이다.


나 혼자 소외된다는 느낌이 확 커지며 기분이 점점 나빠지는데

누가 아주 살짝이라도 심기를 건드리면 “옳지 감사합니다”하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아들도 혹시 이런 건 아니었을까.

‘아들 전담 공익형’은 아들을 위하는 조치 같아 보였지만 이런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들에게 고립감, 소외감을 느끼게 했을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고립감’이라는 것조차 인지 못했을 아들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표현했겠지.

타인에게 손톱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누워 발버둥 치고 책상을 흔들어 넘어뜨리는 것으로.

그렇게라도 해야 자기 마음을 알아줄 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아들은 ‘평화로운 교실의 안전’을 해치는 문제아가 되었고,

반 친구들이 피해를 입지 않는 것과 동시에 아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게 배려한 어른들에 의해 아들은 더욱 강력한 거리두기형, 더 철저한 고립형에 처해졌다.       


배우지 못한 채 얻는 사회성 따윈 없으니,

나는 그렇게 아들이라는 ‘괴물’이 탄생한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학부모들의 동의


같은 반 엄마들 연락처를 수소문해 개별 연락을 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학교 앞 카페에서 같은 반 엄마들이 모였다.

처음 보는 엄마도 있고 이전에 같은 반이었던 엄마도 있었다.      


인사를 건네고 엄마들을 소집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러이러해서 나는 아들 책상을 붙여 앉히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머니들 동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결과가 어땠을까? 반은 찬성했고 반은 반대했다.

당신들의 자녀들과 어울리고 갈등 상황을 풀어가는 법을 배우면서 내 아들이 사회성을 배울 기회를 달라고 하는 건 예비 가해자의 입장만을 고려한 일방적 요구로 보일 수도 있었다.      


나는 설득해야 했다.

왜 이것이 내 아들만을 위한 일이 아닌지.


나는 아들 문제를 아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아들 문제는 아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담임의 문제'와 '친구들의 문제'를 넘어 '반 전체의 문제'이자 '학년 전체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나마 11살이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2년 뒤에는요? 키가 커지고 힘이 더 세질 텐데 그때도 이러면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면요? 그때는 키가 180cm가 넘어갈 텐데 몸무게도 80키로를 넘어갈 텐데 그 덩치로 친구들을 때리거나 책상을 밀거나 하면 그땐 어떡할까요. 저는 전학 안 시킬 거예요. 동환이는 무조건 이 학교에서 졸업할 겁니다”


“동환이가 절 때리는 게 아니잖아요. 집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요. 가족과는 친밀하게 관계 맺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아들이 지금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해 진짜 괴물이 되어버리면 그 피해는 아들이 아닌 지금 같은 학년으로 학교에 다니는 여러분 자녀들이 떠안게 될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은 졸업할 때까지 돌아가면서 계속 제 아들과 같은 반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부탁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도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더 커버리기 전에. 처음에 3개월 정도는 이런저런 갈등이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담임뿐만 아니라 저도 진짜 많이 노력할게요. 가정에서도 이 부분에 사활을 걸고 제가 진짜 많이 노력할게요. 도와주세요”     


그렇게 수명의 1년 정도를 쓴 듯한 에너지를 쏟아낸 뒤 엄마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담임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토록 끈질긴 엄마라니. 결국 담임이 승락했다.

책상을 붙여 앉고 아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동시에 ‘긍정적 행동지원’을 신청해 아들의 문제행동을 소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학교에서만의 노력만으론 아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지.

가정에서도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기로 했다.


아들이 가정에서의 스트레스를 학교로 갖고 가지 않는 것과 동시에

학교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있다면 모두 가정 안에서 분출하고 갈 수 있도록

매일 저녁 아들이 좋아하는 코스로 산책하는 루틴을 지키고

주말에는 외출이나 여행을 통해 행복한 경험을 누적시키기로 했다.


더불어 아들이 격렬하게 거부하는 치료수업은 중단하고

중단한 치료수업을 대신해 더 재미있는 방법으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을 '아들의 문제행동을 소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1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제 막 3월이 겨우 지났을 뿐이었다.

담임도 힘들고 내 마음도 지옥이었던, 길고 긴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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