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도] ④가해자의 엄마
마음 읽기를 했을 뿐인데 문제행동 양상이 바뀌었다
특별했던 어느 해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발달장애인 아들의 ‘문제행동(공격행동)’을 소거하는 데 있어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 해가 끝날 무렵(12월), 담임에게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동환이가 사람도 잘 따르고, 정도 많고, 장난도 잘 치고…. 아마 집에서는 그런 예쁜 아들이었을 텐데 학교에서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서 그간 많이 답답하고 힘드셨겠구나 싶었어요”
아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면 밑의 본 모습을 알아봐준 교사를 만나면서 아들은 행복해졌고 반 친구들은 즐거워졌고 엄마인 나는 치유되었다.
한 사람의 힘이라는 건, 이렇게 작지만 큰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마음을 읽기 시작하다
공격행동 있는 발달장애인에게 장난을 치고 같이 놀기만 하면 당사자 마음이 막 스르르 녹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지면서 공격행동이 소거될까?
앞선 글을 읽고 학교에 가서 공격행동 있는 친구에게 다짜고짜 장난부터 치면 큰 코 다칠 수도 있다.
아들에겐 ‘친해지기’에 앞선 선행행동이 있었다.
바로 ‘마음 읽기’였다.
하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마음 읽기.
나는 요즘 아주 억울해 죽겠다.
한때 그런 말이 있었다.
부자가 빈곤한 자들의 ‘가난’마저 훔친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내 통장은 텅텅 빈 텅장”이라며 가난 코스프레 하는 걸 빗대 하는 말이었다.
일관된 통제와 훈육 없는 무분별한 마음 읽기가 전 국민적 비난을 받으면서
비장애인이 발달장애인의 마음 읽기까지 훔쳤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마음 읽기가 가장 절실한 분야가 발달장애계, 특수교육계다.
언어로 유창하게 자신의 마음(감정)을 전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이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발달장애인에 대해선 ‘행동 교정’에 치중한 나머지 ‘마음의 문제’를 들여다볼 엄두조차 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담임은 아들의 행동을 문제 삼기에 앞서 항상 아들의 마음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읽은 마음을, 아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내가 네 마음 안다고,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했다.
예를 들어 다음 시간이 음악 시간이라 교실을 이동해야 할 때,
아들은 선생님이 가자고 하면 격하게 화를 내며 주변 친구들에게 손을 뻗곤 했다.
이 해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들이 교실 이동하기 싫다고 버티기 시작하면 담임은 아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응. 동환이 지금 이동하기 싫어? 이동하기 싫어서 짜증나고 화났어? 동환이가 지금 하기 싫은 거 해야 해서 마음이 안 좋겠구나”
담임이 아들 마음을 읽고 읽은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면 아들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고.
예전처럼 책상을 흔들거나 옆자리 친구를 때리면서 우는 게 아니라
갑자기 “흐윽~”하며 담임 품에 안겨 흐느꼈다고.
아마 아들이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선생님은 내 맘 알죠? 내가 음악실 가기 싫어하는 거 선생님은 알죠? 그렇죠?”라고 했을 것이다.
담임은 그럴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걸 꾹 참으며 아들이 흐느낌으로 전하는 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고.
“동환이는 속상하거나 화날 때 자기 마음을 공감해주는 거에 금세 행동이 달라지더라고요.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위안되는 게 있는지…”
나는 담임에게 이 말을 듣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행동으로 말합니다
담임은 어떻게 아들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대다수 타인은 말 못 하는 아들의 마음을 읽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동환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는데요”
여기저기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담임은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걸까?
비법이 있을까? 있다면 알고 싶어.
그래야 앞으로 아들과 만나게 될 모든 타인에게 그 비법을 전수할 수 있을 텐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담임은, 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말로 이해하고 있구나!
그래야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아들은 그전에도 행동으로 말하는 아이였다.
그때까지 할 줄 아는 유일한 말이라곤 “시어!(싫어)” “안대(안돼)” 두 마디뿐.
(지금은 “믈(물)” “맘마(밥)” “가가(과자)” “자자” “잘자” 등 열 마디 정도 한다)
말할 줄 모르는 아들은 행동으로 말했다.
과자가 먹고 싶으면 과자가 있는 서랍장 방향으로 엄마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소변이 마려우면 바지를 내리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나 급해~”라는 말을 대신했다.
이렇게 아들은 말을 대신하는 특정한 몇 개의 행동 언어가 있었다.
그런데 담임은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은 아들 마음을 대번에 알아주고 읽었다.
그것도 특정한 몇 개의 행동 언어만이 아니라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서.
말 못 하는 아들 마음을 어떻게 읽었지?
눈으로 봤겠지. 눈으로 읽은 거지. 눈으로 들은 거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이게 가능하려면 특정한 몇 개 동작만이 아닌
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몸으로 하는 말’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 생각을 바꿨다.
단편적이고 특정한 몇 개의 제스처가 아니라 아들이 매 순간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세상에!
아들은 진짜 말하고 있었다.
말 잘하는 비장애인 딸보다 더한 수다로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눈빛으로, 표정으로, 발 까딱임으로, 손가락 동작으로, 의성어로, 목소리의 높은 톤과 낮은 톤으로, 뛰고 달리고 소리치는 것으로 넘치도록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학교와 가정과 치료실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들의 문제행동이 날이 갈수록 강화되기만 했던 이유.
내 말을 들어줘!
보통 사람들은 말하는 건 ‘듣고’ 문제행동은 ‘잡는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말하는 중이었다면
아들 입장에선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무작정 잡으려 했던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왜 내가 말하는 걸 잡지? 왜 듣지 않지?
내 말이 안 들리나?
그럼 더 크게 말해야지.
이 정도로 말해야 내 말을 들으려나?
더 큰 목소리로, 더 큰 행동 언어로!
처음엔 작게 속삭였겠지.
“으응 으으응~” 싫다는 마음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더 크게 말해보자.
“우와아아아앙~”
이래도 안 들어? 좋아. 그러면 더 크게 말할 거야!
책상을 흔들면서 “아아아아아악~!”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어른들이 강한 힘으로 아들의 몸을 제압.
아들의 공격 행동에 친구들이 피해자가 되면 안 되니까, 아들이 가해자가 되면 안 되니까.
그렇다면 보자.
그 순간마다 몸이 잡힌 아들은 아마 “입 닥쳐, 말하지 마”라며 입이 틀어막히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아.
그래. 사람은 말이야.
말하고 있는데 입 닥치라며 말 못 하게 하면 그것만큼 화나는 일이 없거든.
나만 해도 그렇잖아.
부부싸움 할 때 가장 빡치는 순간은 남편이 내 말을 가로막고 자기 말을 할 때거든.
왜 내 말을 안 듣는 건데! 응? 왜!
아들이 그랬다고 생각해 보면, 아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했을까?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입을 틀어막는다고 느낀다면.
텐트럼(분노 발작)! 맞아. 곧장 텐트럼 단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거야.
5분? 10분? 20분?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될 때까지 울부짖고 난리부르스를 췄겠지.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은 진정됐겠지만 그건 아들 마음이 바뀌거나 행동의 잘못을 뉘우쳐서 그런 게 아니야.
말 그대로 진이 빠져서 진정된 것처럼 보이는 거지.
아들 마음엔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들었다는 사실.
그러면서 학습했겠지.
이 정도론 어림도 없다는 것, 다음엔 더 크게 말해야 한다는 것.
그래. 그렇다면 이해가 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가.
크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동환이는 속상하거나 화날 때 자기 마음을 공감해주는 거에 금세 행동이 달라지더라고요.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위안되는 게 있는지…”
그해, 담임은 아들의 마음을 읽었다.
아들의 말(행동)을 눈으로 읽었다.
읽은 건 마음인데, 달라진 건 행동이다.
아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아들 입장에선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작게 말해도 선생님이 내 말을 알아들으니까.
내 맘을 알아주니까.
마음 읽기를 하자 아들이 텐트럼 단계까지 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흑흑흑. 선생님, 내 말 들었어요? 내 마음 알죠? 선생님은 아는 거죠? 흑흑흑.”
담임 품에 안겨 한바탕 울고 난 아들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타인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풀리는 게 있기 마련이다.
(돈 받고 남의 말 들어주는 상담 치료가 괜히 비싼 게 아니다)
마음이 풀어진 아들은 담임이 지시하는 학습에 기꺼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 단계까지 오자 공격행동 양상이 달라졌다.
물론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소리를 지르며 아들의 손이 올라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자신도 깜짝 놀라며 곧 행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곤 온 얼굴로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마치 “죄송해요.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어요”라고 말하듯 미안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마음 읽기’와 ‘친해지기’가 더해지자 아들 공격행동 양상이 변했다.
담임으로부터 이때 배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이후 아들과 내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늘 담임에게 '은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정도로 담임에게 이때 배운 교훈이 우리 가족의 이후 삶을 완전히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따로 있었다.
아들과 우리 가족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성 발달, 특별했던 그해에 가장 빛나던 찬란했던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