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읽을 책에 숨겨 뒀어야 했다.
출국이 며칠 남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루 남았다.
나는 출국을 앞둔 사람이 그렇듯이 버릴 짐, 가지고 갈 짐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옷가지와 자주 아픈 몸을 위한 약들, 그림을 그릴 도구들, 그리고 책 몇 권.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하던 난 두꺼운 디자인 서적들을 들고 옮기는 와중 표지와 앞 페이지들 사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온 것을 발견했다. 땀에 젖은 이마를 한 손으로 닦아내며 몸을 숙여 집어 들어 봤다. 네가 써준 편지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편지를 읽기로 했다. 오래돼 잘 붙지도 않는 스티커로 봉해진 편지 봉투를 열고, 줄 간격이 좁은 편지지에 네가 꾹꾹 눌러쓴 흔적들을 따라 걸었다. 분명 뒤돌아선 후회한 행동에 고마워해주는 모습. 한 없이 작아지는 나를 향해 내밀어 준 손. 편지에는 적혀 있지 않던 기억의 자취, 그 모든 것들까지 나는 길었다.
낯설었다. 어제오늘 뭘 했는지, 느꼈는지 기억도 못하는 내 안에서 세세한 감정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살아나는 것들이. 그리고 참 슬펐다. 온몸이 저리도록. 얼마큼 슬펐냐면. 그 정도를 표현할 단어를 생각해 냈다가, 그 슬퍼하던 내 모습을 기억하곤 다시 까먹어 버릴 정도로 슬퍼했다. 그리고 원망했다. 며칠 전 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정해준 너의 말을. 차라리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을걸 했다. 그랬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 편지를 버릴 수 있을 텐데. 한동안 그 편지를 붙잡고 눈물짓지 않았을 텐데.
그게 아니다.
나는 서늘하던 엘리베이터 앞 좁은 공간에서 너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달려오는 너를 안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함께 해줘서 고맙다며 전화기 너머로 울음을 참지 말았어야 했다. 필기구에 눌려 멍이 든 손에 반창고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다. 그것 또한 아니다.
출국이 24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 너의 편지를 뜯어보지 말았어야 했다. 가볍게 뜯긴 편지 봉투보단 무거운 감정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아니다. 그것 또한 다시 아니다.
그저 그 편지를 덜 읽을 책에, 내가 가지고 가지 않을 책에 숨겨 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