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온 Aug 10. 2017

나보다 강한 존재들에게.

나를 위해 나보다 더 고생했던 당신들에게.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를 나온 나와 간간히 만나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 학교 이름과 전공을 듣고 놀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주로 두 부분에서 놀란다. 하나는 교명에 놀라고, 둘째는 그 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예술과는 큰 연이 없다. 해당 부분에 지원도 적다. 한 학년 150명의 소규모 학군 중에 많아야 2, 3명만 예체능 계열로 가는 상황에 해당 분야에 대한 운영위원회의 관심사가 빈약했던 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 혹은 유관하게 - 내가 지금 그림을 그리기까지 일이 참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수가 적었던 내 학교는 나를 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나는 내 학년의 유일무이한 ‘예체능’ 학생으로 존재하게 됐다. 다른 말로 포장해 보면, 내가 소규모 사회 내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를 독점했다는 뜻이었다. 이는 내가 어긋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더라도 ‘너 참 힙하구나!’라는 감탄 하나로 넘어가는 기묘한 이점 외에도 여러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내 작품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피해 나만의 미의 기준을 확립해 나갈 수 있었다. 입시미술 학원만 주야장천 다녔다면 얻지 못했을 강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다른 아티스트들의 직접적인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같았다. 내 주변 친구들이 멋있다고, 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냐고 치켜세워주는 디자인은 업계의 냉정한 시선 아래에선 처음 크레파스를 잡아서 신난 유치원생의 낙서와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무균실 속에서 한없이 꿋꿋하기만 하던 내 자존심은 첫 외주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한 물류 업체의 로고 디자인을 맡게 됐던 난, 작업 기한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약속했던 결과물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경력도 없는 상황에서 악을 쓰며 얻어낸 작업이었지만, 회사는 냉정하게 다른 디자이너를 고용하겠다 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나선 일주일. 단 일주일 만에 그 회사 사이트에는 다른 디자이너가 제작한 로고가 번듯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는 높게 날았던 만큼 추락했다.


     단 한 번의 실패였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가는 기분이 싫어 디자인에 손도 대지 못한 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언젠간 마주해야 했을 사실이었다. 허나, 자존심만 쌨던 나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문제점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검토하고, 또 도전했다. 비판을 받기 위해 발로 뛰었다. 실력이 늘었고, 성공적인 외주도 진행했다. 하지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눈에 띄게 향상된 디자인 실력에 비해 한번 심하게 망가진 내 자신감의 그릇이었다.


     그리고 이는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나를 괴롭게 했다.


     대학 입시의 막바지에 도달했을 당시였다. 나는 포트폴리오로 제출할 작품 개수를 정하고 있었다. 최종 마감까지 이틀이 남은 상황, 일단 업로드를 끝내 두고 제출은 나중에 하기 위해 10개 남짓한 대학교들의 사이트를 번갈아 접속하며 파일을 업로드하려 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서 그랬는지, 입시 과정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여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3개 남짓한 학교에 업로드를 마치고 다른 대학교 사이트로 넘어가려는 마우스를 조작하는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오고 눈가에 그림자가 졌다. 두려웠다. 단순히 돈 한번 못 받고 끝내는 외주가 아니라, 늦게 시작한 그림 공부가 가치 있었는지, 나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이 기회가 어마 무시하게 커지고 뒤틀려, 괴물로 변해 나를 짓눌렀다.


     떨지 말라고, 지금 떨 때가 아니라고, 마감이 코앞인데,라고 말하면서 오른 주먹을 연이어 내리쳤다. 주먹이 아프지 않았고 떨림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연이어 내리치다 힘이 들어 주저앉아 버렸다. 못할 것 같았다. 평가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잘게 해부당할 내 작품들은 보잘것없이 초라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구석진 공간에 홀로 앉아 울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 N과 M이 다가왔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쭈그려 앉아 떨고 있던 나의 손을 각자 하나씩 붙잡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렇게 둘은 나와 함께 했다. 좀 정신을 차린 나에게 걱정되는 얼굴로 ‘우리도 같이 이렇게 있어줄게. 쭈그리고 같이 울게. 엉엉’라고 말하는 N의 표정에 웃다가, 울다가 정신을 못 차렸었다. 


     그 날 나의 손을 잡아주던 N과 M처럼, 내 모든 역경에 누군가가 나를 잡아줬던 것을 안다. 지금의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이젠 확신한다.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나에게 한번 다시 생각해보라고 다그치던 아버지께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고 나를 감싸 줬던 담임 선생님이 눈물을 닦아 주던 손수건과

     처음 그림을 제대로 그리겠다며 허세로 가득 차 있던 나에게 혼을 내며 길을 잡아주던 화실 선생님이 매번 사주시던 저녁과

     너무 힘들어서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갑작스럽게 건 전화에서 연거푸 죄송하다고만 하는 나에게 괜찮다며 위로해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손이 떨리고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아 울고만 있던 내 손을 잡아주던 친구들의 손과

     내 무기력한 모습에 걱정으로 가득 차, 뭐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친구가 보내줬던 노래와

     길고 긴 입시에 지쳐서 방황하던 밤에 같이 옥상 문을 따고 올라가 별을 보면서 나눈 실없는 농담들

     모두 나보다 한없이 강한 존재였다.


     요즘 누가 나에게 “어떻게 그 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했냐, 너 진짜 대단하다.”라고 할 때마다 당신들의 무게가 더욱 실감이 난다.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당신들의 존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시 한번 고마움에 눈시울이 붉어질까 봐 그저 고개만 살짝 흔들며 “그런 거 아니야”라고만 말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오늘은 걷더라도, 내일은 달려갈래.
If you are there beside me.
박효신 - ‘Home’ 중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물렀던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와 있습니다. 학교 생활이 시작하고 나서도 글을 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꾸준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복통으로 쓰러져 잤다가 방금 일어났는데, 어디서부터 생활을 시작해야 할지, 참 막막합니다. 다음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덜 읽을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